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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선생님, 공자(孔子)

유교를 정립한 공자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며,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나 기원 전 47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공자가 활동한 이 시기는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Pythagoras) 시 대에 해당한다. 공자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곤궁한 집안 살림을 돕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낮은직책의관리가된적이있다.그는비록미관말직이라도소홀히여기지않고자신에게주어진소임 을 다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공자의 명성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 는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수십 명의 걸출한 사상가와 학자가 배출되었다. 공자는 매우 영 향력 있는 중국 최초의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를 일러‘영원한 선생님의 표상[萬世師表]’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자 사상의 진면목은 그의 언행이 기록된“논어”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공자는 제자들이 국가 와 사회에서 유용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여러 경전에 기초한 각종 분 야의 지식을 가르쳤다. 공자가 생각하기에 선생님으로서의 기본적 임무는 고대의 문화적 유산을 제자들을 위해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전달자이지 창작자가 아니다[述而不作].”라고 하였다. 그 러나 공자는 단순한 전달자를 넘어서 자신의 도덕적 개념에 기초하여 전통 제도와 사상을 재해석하 였다. 가령“부모님의 상에서 아들은 3년상을 지내야 한다.”라는 전래의 관습을 전달하면서, 그는 어린아이는 생후 3년 동안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한다. 따라서 부모의 사망에는 감사를 표하기 위해 같은 기간의 상을 지내야 한다며 당시에는 없었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공자 는전달자이상의새로운어떤것을가르쳤다.이러한공자의정신은그의제자들에의해계 승되면서 유교 사상의 특징과 체계가 형성되었고, 유교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는 그날까지 중국을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다.

도덕성의 완성, 공자의 인(仁)

공 자 사 상 을 관 통 하 는 핵 심 범 주 는 ‘ 인 ( 仁 ) ’이 다 . 두 사 람 사 이 의 친 함 을 의 미 하 는 이 단 순 한 글 자 에 대 한공자의언급은많지않지만“, 논어”의482개단락중대략58개단락이‘인’에대한진술로구성되어전 해 온다.
먼저 공자는“인(仁)은 곧 인(人)”이라 하여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가치 표준과 도덕 이상으로써 ‘인’을 제시하였으며, 다시 그것을‘애인(愛人)’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어떤 방법과 과정을 통하 여 자신으로부터 남을 사랑하는 경지까지 도달할 것인가? ’안연이‘인’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을 때공자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애인(愛人)’에 이르는 방법과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자신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을 행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자신을 이겨서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에 돌 아올것이니,인을하는것은자기에게있는것이니,어찌남에게서말미암을것인가?......예가아니면보지말며,예 가아니면듣지말며,예가아니면말하지말며,예가아니면움직이지말라.
-“논어”‘, 안연편’-

흔히‘극기복례(克己復禮)’로 요약되는 위의 진술은 공자의‘인’에 대한 관념을 정면에서 전면적으로 나타내고있는것이라고평가된다.즉‘애인’이객체와의문제라면‘, 극기(克己)’는자신을절제하는힘으 로써‘나’라고 하는 주체와의 문제가 되는 것이며,‘복례(復禮)’란 외재적 형식으로써“극기”를 통해‘시 (視), 청(聽), 언(言), 동(動)’등이 사회 도덕과 규범에 모순됨 없이 실천됨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인’인 것 이다. 다시 말해,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는 바로‘나’를 통해 가시화되는 것이므로‘애인’역시‘극기’를 전제 로 해야 한다. 만약‘극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타인을 사랑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자신의 노력에 의지한 수양 과정을 통하여 군자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와‘인’의관계에있어서‘예’는‘인’의종속관계에있는것이며‘, 예’의본질은‘인’이라고볼수있 다 . 공 자 는 일 찍 이 “ 예 를 배 우 지 아 니 하 여 알 지 못 하 면 몸 을 세 울 수 없 다 . ”고 하 였 다 . 이 것 은 ‘ 예 ’를 사 회 적 독립체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不仁], 예는 해서 무엇하랴.”라고 하여,‘인’이 부재한‘예’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는‘ 인 ’과 ‘ 예 ’는 서 로 분 리 될 수 없 는 하 나 의 정 체 로 파 악 한 것 이 며 , 인 간 에 게 있 어 서 ‘ 인 ’과 ‘ 예 ’ 양 자 가 조 화롭게 체득되어지는 것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인’의 극치는 곧 성인(聖人)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성인은 첫째,“자신의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것이며[修己以安百姓],”둘째“, 널리덕을베풀어중생을구제하는것”이다.이를위하여“자신이서 고싶으면남을먼저세우고자기가먼저도달하고싶으면남을먼저도달하게해야”하며,자기가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시켜서도 안 된다. 여기에서 자신과 타인은 별개가 아닌 하나의 선상, 즉 자신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을 일치시키는‘서(恕)’입장에서 추기급인(推己及人)의 인간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덕(德)으로써 감화하는 공자의 정치사상

공자는 질서 있는 사회를 위해서“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을 바로잡는 일[正名]”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실제적 사물의 이름은, 이름이 그들에게 부과한 의미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제자가 그에게 그 가 만 일 국 가 를 통 치 하 게 되 면 무 엇 을 가 장 먼 저 할 것 인 가 를 물 었 을 때 공 자 는 서 슴 없 이 ‘ 정 명 ’이 라 고 말하였다. 또 통치의 바른 원리를 물었을 때도 공자는“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 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정명을 제시하였다. 어떤 이름을 갖는 개인은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 정치사상의 시작이다.
나아가 공자는 덕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덕치주의를 강조하고 법(法)으로써만 백성을 다스리는 법치 주의(法治主義)를 배격하였다. 덕으로써 정치를 하면 마치 북극성이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모 든 별들이 빙빙 돌면서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이 백성들은 저절로 군주에게 귀의한다. 또 법제(法制)와 금령(禁令)으로써 인도하고 형벌(刑罰)로써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면 백성들은 그 형벌을 면하는 것에만 급급하고 의롭지 못한 행위를 하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덕으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예로써 질서를 잡게 되면 백성들은 불선(不善)한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선(善)에 이르게 되는 행위를 하게 된다. 공자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국가의 통치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다하며 덕으로써 백성을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을 수양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 각하였다. 통치자가 바르면[正] 백성은 저절로 바르게 되며, 통치자가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행(行)하 고, 통치자가 바르지 못하면[不正] 명령할지라도 백성들은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통치자 자신의 수 양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하였다.

공자를 추앙한 맹자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며, 기원전 372경 전국 시대 추(鄒)나라에서 탄생하여 기원전 289경에 생을 마쳤다. 맹자는 젊은 시절 공자를 존숭(尊崇)하였는데, 늦게 태어난 까닭에 공자의 가르침을 직접 받 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맹자가 활동하던 당시는 열국(列國)이 전쟁을 일삼고 각국이 패도(覇道)를 통한 부국강병에 마음을 두었을 뿐,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까닭에 맹자가 주장한 왕도(王道) 사상은 공론으로 여겨지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맹자는 관리가 되는 것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문인을 양성하며 공자의 뜻 을 밝히기 위하여“맹자”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논어”,“대학”,“중용”과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 경전 중에서 진귀하게 여겨진다. 특히 그의 성선설과 양지·양능설 등은 송·명 시대의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정치사상인 왕도 정치사상과 민본주의적 혁명 사상은 동양정치학설의정화라고할수있다.


맹자의 성선설

성선설은 맹자 학문의 근본이다. 맹자는 사람의 성(性)은 본래 선하지만 욕심 때문에 악해진다고 보았 다. 가령 우산(牛山)은 본래 울창한 숲을 자랑하는 산이었지만 나무꾼의 벌목 등으로 벌거벗은 산이 되고 말았다.그러나우산에본래초목이없었던것이아니며,초목이없는것이산의성(性)이아닌것이다.이 처럼‘사람의 성이 악(惡)하다.’함은 우산에 초목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산에 본래 초목이 없었다고 규정하 는것과같이잘못된견해라고보았다.또한맹자는사람은누구나남의불행을차마보고있지못하는마 음이있다고보았다.예를들면어린아이가우물에빠지려고할때어떤도덕적추론을통해그아이를구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구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맹자는 누구나 사단(四端)을 지니 고 있으므로 사람은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맹자는 성선설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양지(良知) 와 양능(良能)을 제시하였다.“어린아이가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고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형을 공경 할 줄 아는 것은 양지와 양능이 있기 때문이며, 측은·수오·사양·시비의 마음은 사람의 양심에 고유한 것이므로양심의내용이라고할수있다.이러한본성에따라행하면백행이다선할것이지만외물의유 혹에이끌려선한본성이가려지는것이다.”즉양지와양능은선천적인것으로사람이배우지않아도능 한 것은 양능이고,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양지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한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물욕(物慾)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 서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사단을 확충하여야 한다. 사단의 마음을 확충하면 작은 불씨가 큰불이되는것과같이혹은작은물방울이모여도도히흐르는큰강물이되는것과같이선(善)의능력 이 강대해져서 물욕을 없애고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 호연지기를 기른다. 호연지기란 굳세고 올곧은 기개로 의와 도를 짝으로 하는 것으로서 선을 쌓고 의를 쌓아감으로써[集義] 이루어진다. 만일 자 기 양심에 비추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면 호연지기를 얻을 수 없다. 맹자는 이러 한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을‘대장부(大丈夫)’라고 불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의 길이다. 그러나맹자가보기에사람들은그길을버리고가지아니하며,그마음을방치하고다시찾을줄을알지못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르는 가축이 집을 나가면 찾아보지만 자기의 방심(放心)은 다시 찾을 줄 알지 못한다. 따라서 맹자는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으며, 그 잃어버린 마음[放心]을 찾아들이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맹자의 정치사상

맹자에 의하면, 통치자는 마땅히‘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으로써 백성을 다스려야 하 며,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지 않는 자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 백성은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 이 있게 되므로 농시(農時)를 어겨서는 안 되며, 산업을 장려하여 생활을 넉넉히 하도록 하여 부모를 봉양 하고처자를양육하는데부족함이없게해야한다.그리고통치자는백성의부모라는심정을가져야한 다.백성을해하는자는군주라고할수없다.인(仁)을해하는자를적(賊)이라하고의를해하는자를잔 (殘)이라고 하며, 잔적은 하나의 남자에 불과하다. 주(紂)는 잔적의 행위를 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를 죽인 무왕(武王)은 도적을 죽인 것이지 군주를 시해한 것이 아니다. 맹자는 또한 국가에는 백성이 제일 귀(貴) 하고 다음은 사직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다고 하였다. 통치자에게 과실이 있으면 간(諫)하고 몇 번이고 간 하여도 듣지 않으면 통치자의 자리를 폐(廢)하여도 무방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맹자는 인의를 주로 하 고 공벌을 배척하였으며, 국가의 기본이 백성이라는 민본 정신에 의거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군주는 배제 해도 무방하다는 역성혁명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 시대 사상의 집대성자, 순자

순자는 전국 시대 조(趙)나라 출신이다. 이름은 황(況)이며, 자는 경(卿)이다. 순자는 맹자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계승자임을 자칭하였다. 순자는 백가쟁명과 자신의 학술 사상을 총결하여“순자”라는 책을 남겼는데, 이는 선진시대의 중국 사상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순자는 잡가가 아니며 유가 이외의 다른 학파에는 속하지 않는다.“순자”는 비록 제자백가의학설을 널리 섭렵하고 종합하였지만, 가장 근본적인 사상은 공자 학설의 계승과 발전이다. 그것은“순자”의 전편에서 공자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자처할 뿐만 아니라, 사상적 특성으로 볼 때 공자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인‘인(仁)’과‘예(禮)’를 강령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맹자가 인의(仁義) 사상을 보다 구체화시켰음에 비해, 순자는 예악(禮 樂) 사상을 더욱 구체화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맹자가 내성(內聖)의 측면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면, 순자는 외왕(外王)의 측면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용 어는“장자”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지만, 의미상 본다면‘안으로는 성인(도덕), 밖으로는 군주(왕도)를 이 룩 하 는 것 ’으 로 , 결 국 유 학 의 종 지 인 ‘ 수 기 치 인 ( 修 己 治 人 ) ’과 같 은 뜻 이 다 . 맹 자 는 분 명 빛 나 는 일 면 을 지 니고 있지만 만일 유가가 전적으로 맹자의 노선을 따라 발전해 왔다면 일찍이 신비주의와 종교로 빠져들 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자가 강조한 인위(人爲)와 그것으로써 자연을 개조하는 성악설이 맹자가 추구한 선험적 성선론과 선명하게 대립하면서 유가는 인문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지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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