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사상 - 유교와한국유교윤리사상 - 빨리 시작하는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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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없는사랑을강조한묵자

묵자(기원전 476~기원전 390)는 춘추 시대 말~전국 시대 초를 풍미했던 사상가로 서, 당시 사회가 지닌 많은 문제점을 제자(諸子)들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진단하고 그 것을 치유하기 위한 혁신적 이론들을 제기하였다. 묵자는 당시 사회에 큰 파란을 일으 켰으나, 진한(秦漢) 이후 그의 이론은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묵자는“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부유한 자가 빈곤한 자를 업신여기며,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유린하며, 교활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농락하는”사회적 현실과“지친 자는 쉬지 못하고, 주린 자 가 배를 채우지 못하며, 추운 자가 옷을 입지 못하는”개인적 불행이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로“서로 사랑하며, 이익을 나누려는”정신이 결핍되어 실천되지 못한 것이라 지 적하였다. 그리고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겸애(兼愛)’로써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 회, 사회와 사회가 지닌 모순과 대립을 극복하여 도덕적이고 평화로운 질서를 되찾고자 하였다. 또한 묵자는 생산과 생산력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중국 사상가로서, 물질적 조건이 인 간의 윤리적 삶과 사회 제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따라서 묵자는 통치자들의 사치와 낭비 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것이 국가와 사회,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속속들이 밝혀냈다. 특히 유가의 사치스러운 예(禮)와 악(樂)을 피함으로써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를 갖추고자 하였으며, 사회적 재화 와 백성의 노동력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묵자의 절용(節用) 사상

묵자는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항상 백성의 이익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백성의 이익을 배로 증대시키는 길은 절약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재물을 낭비하게 하는 유가의 성대한 의식을 비판하였다.
옛날의 왕과 성인(聖人)이 천하의 왕이 되고 제후들의 수장이 된 이유는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두터이 이롭 게 하고, 충성과 믿음을 서로 연결시키고, 또 그들에게 이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토록 싫어하 는 자가 없었고 후세에도 싫증을 내는 사람이 없었다. 옛날에 밝은 왕과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고 제후들을 바로잡은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다. ...(중략)...
옛날 성왕(聖王)들은 먹고 마시는 법칙을 제정하여 말하기를“배고픔을 채우고 기운을 돋우며 팔다리를 강하게 하 고귀와눈을밝게하는정도에서그친다.다섯가지맛과향기의조화를다하지않고,먼나라의진귀하고특이한물건 을 쓰 지 않 는 다 . ”라 고 하 였 다 .
“- 묵 자 ”‘, 절 용 ’


유가의 애인(愛人)과 묵가의 겸애(兼愛)

전국 시대 유가와 묵가는 현학(顯學)으로 병칭되었다. 양가 학술의 주된 요지는 당시 사람들에게“공 자는 인(仁)을 귀하게 여기고, 묵자는 겸(兼)을 중시한다.”로 귀납되었다. 공자는“사람을 사랑할 것[愛人] ”을, 묵자는 천하가“서로 사랑할 것[兼相愛]”을 주장하였다. 얼핏 보면 양 학파의 주장은 매우 흡사하 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 보면 양자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유가의‘애인(愛人)’설은“사랑에는 차등이 있 다 . ”는 것 을 주 장 하 는 것 인 데 반 해 , 묵 가 의 ‘ 겸 애 ( 兼 愛 ) ’설 은 “ 사 랑 에 는 차 등 이 없 음 ”을 주 장 하 는 것 이 다. 공자는“널리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히 여겨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와 맹자는 사랑에는 차등이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즉 자신을 기점으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 나가는 것으로[推己及人],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점점 확대해 나가는 것이었다. 사랑의 선후, 정도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사랑에는 차등이 있게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타인의 부모에 대한 사랑에는 선후, 친소, 후박(厚薄)의 구분이 있다. 이런 것은 유가 에 게 있 어 뒤 바 뀔 수 없 는 것 이 고 , 완 전 히 예 에 부 합 하 는 것 이 었 다 . 그 런 데 묵 자 의 ‘ 겸 애 ’는 원 근 , 친 소 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남의 나라 보기를 자신의 나라를 보는 것처럼 하고, 다른 집안 보기를 자신의집안을보는것처럼하며,다른사람의몸을보는것을자신의몸을보는것처럼한다.”고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모를 대하는 것을 예로 들며 말하기를“반드시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이롭게 하는 일에 종사한 연후에 다른 사람도 나의 부모를 이롭게 하고 사랑하는 일 로써 나에게 보답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유가는 찬성할 수 없었으며, 이는“근본을 두 개로 설정하는 것”, 즉 두 부모를 승인하는 것과 같다고 배척하였다.


한비자의 주요 사상

한비자는당시사회를구제하는데있어유가나도가의주장으로는도저히될수없고오직법치주의 로써만 가능하다고 확신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이기적 근성의 일면을 본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였기 때 문이다. 한비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규정하였으므로 그 악을 제거하는 데는 공자의 인이나 맹자의 인의,순자의예등의윤리적제재보다는법률적제재를가하는것이더효과적이라고보았다.그는인 간이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 자체도 이기심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또한 백성이 범법행위를 하는 것은 형벌이 가볍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작은물건이길위에떨어져있다면누구나그것을주우려할것이다.그러나빨갛게타고있는백량의황금이있다 면화상이두려워어떤도둑이라도손을대지않을것이다.이와같이해를받을염려가없으면아무리작은것이라도 그것을취하는데주저하지않으나,해를받을것을알면어떠한대금이라도줍지않을것이다.
한비자는 법과 술을 겸하여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법이 제정되면 군주와 법 관은오직그법을주저없이집행해야하며그어떤정황도고려해서는안된다.군신간에는전혀사의 (思義)가 없고, 법에 의한 이해와 상벌만이 있을 뿐이다. 통치자가 신하를 제어하는 통치술로써 신하는 반드시악한것이고군주의지위를탐한다는점을전제로한다.따라서아무리작은죄라할지라도반드 시 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이해(利害)를 따져 행동하는 이기적 존재!

•사람은 이기적 목적으로 주고받는다. 이해관계가 맞으면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 화목하게 살 것이고, 이해가 충돌한다면, 아비와 자식이라도 서로 충돌할 것이다.
•수레 만드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모두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일찍 죽기만
을기다린다.수레만드는사람이더착하고관만드는사람이더악해서가아니다.사람들이부자가되 지않으면수레가팔리지않고,사람들이죽지않으면,관이안팔린다.종사하는일의업종에따라이 해타산이 다르다. 이해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이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
•뱀장어는 뱀을 닮았고, 누에는 송충이와 흡사하다. 사람들은 뱀을 보면 깜짝 놀라고, 송충이를 보면 소 름이 오싹 끼치지만, 고기잡이는 뱀장어를 손으로 주무르고, 여자들은 누에를 손으로 만진다. 이득이 생기기만 하면 사람은 누구나 최고의 용사가 되는 것이다. “- 한비자”-


풍류도

한국 사상사는 유·불·도 삼교를 주도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심층에는 외래 사상 을 수용하기 이전, 한민족 고유의 원초적 사유가 작동하고 있었다. 신라 말의 대표적인 지식인 최치원은‘난랑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풍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포함 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가정에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공자 의가르침과같으며,모든일을순리에따라묵묵히실행하는것은노자의가르침과같고,악한행동을하 지 않고 착한 행실만을 신봉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같다.
최치원에 의하면, 풍류도에는 유·불·도 삼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유 사 상과 외래 사상을 엄격히 구분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유·불·도 삼교를 우리 고유의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유·불·도는 우리 민족 본유의 정신과 괴리되지 않는 전통 사상이라고 하여도 무방하다. 다 시 말 해 위 의 글 에 서 ‘ 현 묘 한 도 ’라 고 표 현 된 한 민 족 의 원 초 적 사 유 가 없 었 다 면 우 리 는 한 국 사 상 의 정 체성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상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사상은‘시대의 산 물’로 하나의 사상 체계는 그 시대가 제기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창조적으로 구축된다. 풍 류도와 같은 한민족의 원초적 사유와 역사적 경험이야말로 중국에서 발원한 유교와 도교, 그리고 인도에 서 시작되어 중국을 경유하여 전래된 불교를‘한국의 사상’으로 정립시킨 기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성리학의 수용과 전개

성리학의한국적수용과발전과정을살펴보면고려말안향이중국연경에이르러주희의저술을보 고 이를 베껴 가지고 돌아온 것이 주자서(朱子書) 전래의 처음이라고 한다. 안향은 성리학이 오륜(五倫) 의 도리를 밝히고 불교를 배척한 것을 극구 찬양하면서, 불교가 어버이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을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하여 매섭게 비난하였다. 이후 조광조에 이르러 성리학은 윤리적 측면에서 발전하여 도학(道學)으로까지 심화되었다. 도학은 단순한 윤리 사상이나 의(義)와 이(利)를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심 내부에 있어 순일(純一)하고 무잡(無雜)한 내면에서 성찰(省察)하고 존양(存養)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성리학은 윤리적 차원을 넘어 신성한 종교적 차원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조광조는 도학 사상으로 윤리를 넘어 생사(生死)를 초월한 경건한 태 도로 의리를 높이고 권세를 천하게 보며 도심(道心)을 높이고 인욕을 제거하여 성인(聖人)의 도를 따르고자 하였다. 구한말 의병들이 활동할 때 그 격문을 보면 이러한 조광조의 정신을 준거로삼고있음을알수있다.조광조이후이황과이이가등장한16세기는성리학의전성기 를 이루었고, 한국 유학계의 군현(群賢)을 배출한 황금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심원한 철학 사상과 정신세계는 세계 철학 정신사에 있어서도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고 할 것이다. 이중에 서도 이황과 이이는 절정기의 쌍봉으로 후기 한국 사상계에 주벽(主壁)을 이룬 것이라 하겠 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사상은 해외로까지 전파되었으며, 이황의 성리학은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의 학술 사상과 정치 교육의 교학 사상으로 연원을 이루게 하였고, 일본 문화를 순화하였 다. 이이의 철학 사상은 그가 생존하던 당시부터 그 명성을 중국에까지 드날려 동방의 천재적 철인으로 그 빛을 발하게 하였다.


이황의 생애

이황이 출생하기 3년 전에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4살이 되던 해 갑자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 이 희생되었다. 또 19살 때에는 기묘사화, 45세 때에는 을사사화가 일어나 전국의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었다. 이처럼 이황은 생애 대부분을 사화 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50세 이후 말년에 이황 이 은퇴하게 된 동기는 소극적으로 현실을 버렸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혼탁한 정쟁의 와중에 서 섞이지 않고, 겸선(兼善)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독선(獨善)을 취하며, 나아가 인재를 교육 하고 의(義)와 이(利)가 혼돈된 사회 풍조에 있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분명히 하 여 학술적으로 진리를 밝히며 가치 체계를 잃지 않으려는 적극적 의지와 견고한 각오였 다고평가해야할것이다.그는서울에서벼슬을하고있을때에도항상고향에돌아가 고자 하였고, 고향에 돌아가면 다시 나라에 대한 걱정이 든다고 하였다. 군자가 은거 하는 것은 범인이 은거하는 것과는 다른 뜻이 있으며, 들어와 은퇴하였다 하더라도 숨은 공부가 있어야 한다고 제자들과 문답한 바도 있다. 이 숨은 공부에는 다름아닌 적극적으로 학문과 교육, 교화를 통해서 진리의 표준을 높이 드러내고 사회를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내포 되어있었다고할수있다.따라서이황의사상과저술들은이같은상황에서이를치유하고바로잡고자 하는 철학 정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황의 사단칠정론

사단칠정론은 조선 최대의 학술 논쟁으로서 조선 성리학을 성립시키고 이른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라는 학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학파(學派)와 정파(政派)가 일치하게 됨에 따라 성리학적 이상 정치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학설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 사회가 제기 한 문제를 이론 체계에 의하여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리학이 창조적으로 재해석됨으로써 조선의 성 리학으로 토착화되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이 황 은 1 5 5 3 년 정 지 운 이 “ 천 명 도 설 ”에 서 “ 사 단 은 이 에 서 발 하 고 , 칠 정 은 기 에 서 발 한 다 . ”라 고 말 한 구 절을“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로 수정하였는데, 1558년 기대승의 지적을 받 은후“사단의발은순수한이이기때문에선하지않음이없고,칠정의발은이와기를겸하기때문에선 악이 있다.”라고 다시 수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대승이 비판의 글을 보내오자, 이것으로 사단·칠정 논 쟁이 시작된다. 기대승은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대립시키는데, 그 근거를 각각 이와 기에 둠으로써 이기 를두개의존재로나누어인식하는오류를범했다고비판하였다.이에대해이황은이기는분리될수없 으나 본연지성은 이기가 부여되어 있는 가운데 나아가 이의‘원두본연처(源頭本然處)’를 가리켜 말한 것 이 다 . 따 라 서 가 리 키 는 바 가 이 에 있 음 으 로 ‘ 본 연 지 성 은 이 ’라 고 하 여 순 수 선 성 을 확 보 한 것 과 같 은 논 리 로, 사단은 이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사단은 인·의·예·지의 성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며, 칠정은 외물에 촉발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은 모두 이기를 벗어나지 않지만, 그 근원처를근거로하여각각그주로하는바와중요하게여기는바를가리켜서말한다면‘사단은이,칠 정 은 기 ’라 고 말 하 는 것 이 불 가 능 하 지 않 다 고 주 장 하 였 다 . 이 황 은 다 시 “ 사 단 은 이 가 발 함 에 기 가 따 르 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타고 있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였으나, 근본 입장이 바뀐 것은아니다.사단은이와기가함께있는가운데에이를주로말한것이며,칠정은기를주로하여말한 것으로서, 이와 기가 현실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양자를 엄 밀히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이의 생애

이이는 49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정확하게 계산해 보면 47년하고 21일간의 짧은 생을 살았다. 소 년기에는 배움을 닦아 가던 시기로 일찍부터 그의 천재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청년기는 불교 에 깊이 빠져 금강산에 입산하였다가 도학(道學)으로 돌아와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고, 이황을 찾 아가 학문의 길을 물었던 탐색의 시기로 이 시기에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중년기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활동의 시기로 조정에서 정치를 논하는 중심에 자리 잡았고, 해주에 내려가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중요 저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저술되었다. 그의일생가운데가장특기할만한것은그가23세되던해에이황을방문한사실이다.당시이황은58세로당대에가장명망높은원로석학이었고,이이는일찍부터천 재로 이름을 떨치던 청년이었다. 이이는 이황을 일부러 찾아간 것이 아니라, 지나가던 길에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했는지 모르지만, 이황은 이이의 영민한 재주와 학식에 감탄하고 무척 반겼던 모양이다. 이 자 리 에 서 이 황 은 수 양 론 의 중 심 주 제 인 ‘ 한 결 같 음 을 주 장 으 로 삼 아 모 든 변 화 에 대 응 한 다 . ’의 뜻 을 묻 기도 하고,‘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 중용의 도에 맞는지 여부를 토론하기도 했다. 또한 이이는 이황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불교에 빠져 금강산에 입산했었던 사실까지 솔직히 털어 놓으 면서, 그 과오를 깨닫고 유교의 가르침으로 돌아왔음을 밝혔으며, 이황에게 학문의 길을 물었다.



이이의 사단칠정론

이이는‘사단’과‘칠정’의 관계를 두 방향으로 갈라져 나간 대립적 감정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서 인간 의 도 덕 적 평 가 에 따 라 선 한 감 정 만 을 표 출 시 킨 것 을 ‘ 사 단 ’으 로 파 악 하 였 다 . 이 처 럼 이 이 의 사 단 과 칠 정 의관계에대한인식은이감정들이하나의근원에서발생되어나온것으로,본래같은차원이요동일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다만 선악의 도덕성에 따른 평가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구 별하고 있을 뿐이다.
이황에의하면“, 사단은이가발함에기가따르고,칠정은기가발함에이가탄다.”고하였는데,기가발함에이가탄 다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칠정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단도 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우물 에빠지는것을본뒤에야측은한마음을발하기때문이다.이것을보고측은히여기는것은기이므로기발이라는것 이고, 측은한 마음의 근본은 인(仁)이므로 이것을 이발이라고 한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이 각각 부분적인 정과 전체적인 정이 있는데, 부분과 전체를 대비하는 것이 잘못 이고, 또 대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발이라고 한 것은 더욱 잘못이라는 것이다. 정은 기발에서 작용하게 되는것이기때문이다.그가보기에정이발할때발하는것은기요발하는까닭은이다.기가아니면발 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이이는‘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만을 인정 하게된다.그는이러한그의생각에대해성인이다시나오더라도바꿀수없다는자신의의견을피력하 기도 하였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도가 철학에 대한 인식 ‘숭유억불(崇儒抑)’과‘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거칠게 말하면 조선 시대 500년은 전반적으로 주자학이 지배했고, 상대적으로 도가 사상과 불가 사상은 이단(異端)으로 여겨져 배척당했 다. 하지만 정조(正祖)는“노·불(老佛)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그 말류의 폐단을 말하는 것이지 처음 입각처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이단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더 나아가 노·불은 유 학과 함께 풍속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권면하는 공통적인 공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등 시대가 변함에 따라조선초부터이어져내려온도가사상이나불가사상에대한벽이단적사유는변하게된다.도가사 상에대한조선성리학자들의태도는대체로세가지로나누어고찰할수있다.
먼저,‘유가 우월주의 입장에서의 벽이단적 사유’이다. 즉 성리학의 이기론적 차원에서 이(理)의 우월 주의를 강조하면서, 도가 사상을 기(氣)적 측면에서 이해하고 이단시하는 입장이다. 조선 초 정도전을 비롯하여 이황 등이 이런 입장을 취했
다. 이들 비판의 특징은 주로 도가 사상이 우주론과 윤리론의 측면에서 유가와‘차이점’을 보이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음은‘유가적 입장에서 노장을 포용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주로 유가와 도가와의 차이점보다는‘같은 점’에 주목한다. 이런 입장은 흔 히 유가 입장에서‘노자’를 이해한다는‘이유석노(以儒釋老)’의 입장에 속한다. 물론‘이유석노’의 입장에서도 도가를 비판하는 입장이 있지만 주로 포용하는 측면이 많다. 율곡 이이가 대표적이며, 그는 일정한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에 맞는 내용을“도덕경”81장에서 뽑아 그것을 자 신의 철학 체계 속에서 새롭게 장을 나눈“순언”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조선 시대의 유학 이외의 학문은 곧 이단이라는 사회적 금기와 학문적 폐쇄성을 깨고 노자 사상의 효용성을 긍정하는 입장이다. 끝으로‘객관적으로 도가 사상을 이해하는 입장’이다. 박세당, 홍석주 등이 이런 입장에 속한다. 이들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유가 사상과 노자 사상의 동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자한다.이런입장에서도유가우월적사유가있기는하지만,이전에비해도가사상을이 해하는 데 있어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특히 박세당은 조선 시대에 유일하게 “도덕경”과“장자”를 주석한 인물이다. 그는“노자의 도는 비록 성인의 법에 맞지 않으나, 노자의 뜻은 유가와 같이‘수신치인’하는 데 있었다.”고 말하여“도덕경”에 담김‘수기치인’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한국의 양명학

양명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대체로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수인이 생존해 있던 1521년 전후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 시대는 세조의 왕위 찬탈 사건을 위시하여 계속되는 사화(士禍) 등으로 통치자의 도 덕성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자들은 통치자의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도학 정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 정치적 안정을 꾀 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리학을 반대하는 양명학이 전래 초부터 성리학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은 것은 당 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당연한 결과였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양명학이 뿌리를 내릴 수 없었으며, 양명을 공부하는 학자들조차 양주음왕(陽朱陰王)의 형태로 숨어들게 되었다.
양주음양은 겉으로는 성리학자이지만, 속으로는 양명학자라는 뜻인데, 성리학자를 표방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시대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 시대의 양명학자들 은 때로는 국정에 참여하여 자신의 뜻을 피력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사회 현실에 뛰어들어 당시의 직면 한 문제들을 해소하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가령 정제두의 경우, 내실(內實) 사상에 입각하여 현실의 문제에 있어 농업 정책의 모순에 대한 개선책 이나사회적노비제도의개선등을제시하여백성들의삶의질을높일수있는제도적장치를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조선의 양명학에 대한 연구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와서 정 인보(鄭寅普)와 이능화(李能和)에 의해서였다. 그들의 연구는 조선 시대의 양명학파에 대한 최초의 연구 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를 계기로 조선 시대의 양명학자들에 대한 연구가 점차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1950년대 이후에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조선 시대 양명학의 실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실학사상

성리학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한자 문화권에 있어서 하나의 보편성을 가지다시피 하였다. 말하자면 성리학은 동양에 있어서 중세적 세계주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우리나라 봉건 교학의 절 대적 권위주의가 구축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체적 자각이 절실히 요망되었고, 이에 따라 현실성을 상실한 학문을 바로잡고 자아의 각성으로 우리의 현실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세 우기위해서새로운학풍,즉실학이일어나게된것은역사를통한우리민족의예지의발휘로서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 여러 갈래의 유파 가운데 경세치용을 중시하는 것을 실학이라 하고, 혹은 이용후생 의 학, 구체적으로 농업과 공업, 상업에 관학 학문을 실학이라 하고, 또는 실사구시의 금석과 고증학을 실 학이라고 생각하는 등 제각기 학문 분야를 달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모두 당시 의 성리학적 세계주의 속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을 지향해서 실용·실증을 창도했다는 점에 일치 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풍을 실학으로 인식하고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애국 계몽기의 선각자들에 의해서였는데, 애국적 선각자들은 학문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애국적 정치·문화 활동에 있어 서도 이 신학풍을 하나의 정신적 자원으로 동원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실학자들이 남긴 명제들을 보면 근대화과정에필수적인토지제도,상공업,그밖에생산기술의개혁과향상에관한것,그리고생활과사 상에 있어서의 실용·실증적 정신의 보급에 관한 것들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애국 계 몽기의 선각자들에게 현실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따라서 그것들을 실학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약용의 생애

정약용은 1762년 서울 근교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루소가“사회 계약론”을 출간하여 프 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씨앗을 뿌려 놓은 해이기도 하다. 정약용은 16세 때 실학자 이익의“유고”를 읽 고 실학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박지원과 박제가 등과 접촉하면서부터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은 23세 때 천주교의 서적과 서양 근대의 천문학, 수학, 지도, 시계, 망원경 등의 기물을 보았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부패하고 타락한 유학의 유해성을 깨닫게 하고, 중국 중심의 협소한 세계관 을 수정하게 하였으며,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의 학습으로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그것은 자 신의 선진적인 실학사상을 한층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3세의 젊은 나이에 경기도 암행어사에 임명된 그는 각 지방을 순찰하면서 극도로 피폐한 백성들 의 처절한 궁핍성과 지방 행정의 부패와 난맥상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훗날 그가 백성을 위한 진보적인 정치와 경제 개혁안을 구상하여 발표하게 된 기틀이 실로 이때 다져졌던 것이다. 강직한 성격을 타고난 정약용은 탐관오리를 발견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색출하여 처단하였다. 이로 인해 정 약용은 백성들로부터는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나 반대파들로부터는 시기와 불평을 샀다. 그의 18년에 걸 친유배생활은바로이러한이유에서기인하는것이다.하지만그는유배생활과정에서실학사상을집 대성하게 된다. 그는 집권자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정열과 노력을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해결할수있는실학을위해쏟아부었던것이다.

정약용의 성기호설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눈다. 본연의 성은 인간이 태어날 적에 하 늘로부터 타고난 천리로 순선한 것이며, 인·의·예·지의 사덕이 곧 그것이다. 또한 본연의 성은 인간 과동물간에차이가없고인간상호간에도차별이있을수없다.다만인간상호간또는인간과다른생 물 간에 현우(賢愚)와 귀천(貴賤) 등의 차이가 있는 것은 기(氣)의 차이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희 의‘성동기이론(性同氣異論)’이다. 이에 대하여 정약용은 인간만이 도의(道義)의 성과 기질의 성을 겸비 하고, 동물은 오직 기질의 성만을 타고난다고 보아, 인(人)과 물(物)의 성이 본래부터 다르다고 주장하였 다.또한도의의성과기질의성은모든인간이똑같이타고나는것이므로인간은선천적으로현자와우 자, 성인과 범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도의의 성이란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 는 마음으로서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상제(上帝)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선천적인 인성은 만인이 평등한 것이지만 후천적인 태도에 따라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나타난다. 즉 스스로 기질 의성을억제하고도의의성을따르는자는현인이나군자가되고,반대로스스로기질의성만을따르는 자는 수인이나 우자가 된다. 따라서 정약용은 인간의 주체적인 도덕적 수양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정약용은 인간의 성은 선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의 경향성 과 같은 것이라는 성기호설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맹자가 말했던“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말 의 참뜻은 인간이 원래 선한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성은기호이다.하늘은사람에게선을하려하면선을할수있고,악을하려하면악을할수있는자유의지를주었 다.그권능이자기에게있어금수의정해진마음과같지않다.그러므로선을하면자신의공이되고,악을하면자신 의죄가된다.
성(性)이란 마음의 기호일 뿐이다. 채소가 똥거름을 즐기고 연꽃이 물을 즐기는 것과 같이 사람의 본성은 선을 즐긴 다. 지난날의 선배들이 본성을 말한 것은 모두 맹자의 본뜻과 다르다.
정약용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 기호가 있다. 하나는 영지(靈知)의 기호, 즉 영성적 또는 지성적 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구(形軀)의 기호, 즉 육체적 또는 감각적으로 즐기고 좋아하 는 것이다. 영지의 기호란 우리가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미워하며, 덕행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며, 하늘이 명한 성품이다. 이처럼 정약용의 인성론은 주희의 그것과는 다른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인·의·예·지의 명칭은 실천이 있은 다음에 성립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인(仁)이라고 할 수 있 으며,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는 인이란 성립되지 않는다.
위의 진술은 성리학의 인성론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서 실천을 중시하는 정약용의 성기호설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나아가 그는“성리학은 도를 알고 자기를 인식하며 실천에 진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을 하는 사람들이 이(理)니 기(氣)니, 성(性)이니 정(情)이니, 체(體)니 용(用)이니, 본연이니 기질이 니, 이발(理發)이니 기발(氣發)이니 하여 서로 조롱하고 투쟁하며 자기의 주장만 옳다고 내세워 비실용적 이고 실천적인 개념의 유희(遊戱)만을 일삼아 온 폐단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위정척사와 이항로

서양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사설(邪說)을 전파함이 어찌 다른 목적이 있어서이겠는가? 자기와 같은무리를심어안과밖이서로응하여우리의허실을정탐하고군대를이끌고오려는것이다.
-이항로-
이항로(李恒老)는 위정척사 사상의 거두로서 기정진, 최익현 등과 함께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철학을 주도한 사상가이다. 그는“주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듣지 않을 것이며 주자의 뜻 이 아니면 감히 따르지 말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한 주자학의 신봉자였으며 이존기비 (理尊氣碑)의 주창자였다.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주자를 존숭하는 존주 사상(尊朱思想)이나 이 존 기 비 론 에 기 반 을 둔 것 으 로 , 그 사 상 의 입 장 에 의 하 여 무 엇 이 ‘ 정 ( 正 ) ’이 며 무 엇 이 ‘ 사 ( 邪 ) ’인 가를 분별하였고, 어떻게 정을 지키고 사를 물리칠 것인가를 제기하였다. 그는 또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義)’와‘이(利)’의 구분을 철저히 하여 의를 실행하고 멸륜(滅倫)의 화를 불러들이는‘이’를 억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는데, 그것은‘이’를 성명(性命)에서 근원하는 천리와 형기(形氣)에서 발원하 는 사욕(私慾)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항로는‘이’, 즉 인욕 가운데서 가장 폐단이 큰 것으로 통화(通貨) 와 통색(通色)을 들었으며, 이것은 멸륜의 화를 자초하고 인간을 금수로 떨어지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하 여 배척하였다. 그리고 통화와 통색을 서구인들의 전유물로 보고 위정척사에 앞장섰던 것이다.“양적(洋 賊)을 격퇴하자는 것은 우리의 편이요, 양적과 화의하자는 것은 적의 편”이라고 했던 이항로의 척사론은, 그의 문인인 최익현에게 이어져 척양척왜 사상으로 발전하고, 을사보호 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될 때‘오 도(吾道)’의 보존과 민족의 방위라는 민족주의 사상으로 발전해 나갔다.


개화사상

처음 개화사상을 주창하고 이에 호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876년 한·일 간에 수호 조약을 체결한 이른바 개항 이후로는 세계의 정세에 대한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척사론이 비등하는 분위기 속에 심한반발을받으면서도개화사상은양반관리들에게큰영향을주었다.당시의개화운동은크게두계 파로 구분된다. 하나는 청에 사대적 관계를 유지하며 그 원조에 의하여 개화를 실시하려는 계파이며, 다 른 하나는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급진적으로 개화하여 청의 간섭을 배격하고, 참된 독립 국가 의 건설을 목표로 개혁할 것을 주장한 일파이다. 흔히 전자를 온건 개화파, 후자를 급진 개화파라고 구별 하는데온건개화파는중국의양무운동과같은동도서기적인개화방식을따르려고한데비해,급진개 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변법적 개화를 모델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초기의 개화 세력 은 모두 위정척사론자인 유림 세력에 대립적이었으므로 개화파라고 불렸다. 개화사상의 분화나 그것을 바탕으로한개화파의분화문제는어디까지나사상관계이니만큼,사상적내용이그구분기준이되어 야할것이다.가령계파의기본정신이자주독립을더중시하였는가,서양의과학기술의수용에더역점 을 두었는가, 혹은 온건·급진 개화사상의 기본 정신이 체제내적 개량인가, 체제 변혁을 위한 개혁인가 하는 것 등이다.

동학

동학은 최제우가 창시한 한국의 민중 종교이다. 동학이란 이름은 서양으 로부터 중국을 거쳐 전래된 서학(西學), 즉 외래 종교와 학문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나라의 도(道)와 학문을 일으켜 세운다는 뜻에서 최제 우가 붙인 이름이다. 여기에는 동학 혁명의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나타 난척왜양의반외세사상이소박하게담겨있다고볼수있다.동학의창 시자인최제우는자신이거느리고있던두명의여자종을해방하여한사 람은 며느리로, 다른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음으로써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하 늘 님 ’을 모 시 고 있 다 는 ‘ 시 천 주 ( 侍 天 主 ) ’사 상 을 몸 소 실 천 하 였 다 . 또 그 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제창하면서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널리 구제하여 편 안하게 만들고자 하였으며, 갑자년을 시작으로 낡은 선천(先天) 5만 년이 끝나고, 이상적인 세상, 즉 후천 ( 後 天 ) 의 5 만 년 이 새 로 열 린 다 는 ‘ 후 천 개 벽 사 상 ’을 제 기 하 기 도 하 였 다 . 아 울 러 부 자 와 가 난 한 사 람 , 지 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돕고 아껴야 한다는‘유무상자(有無相資)’사상을 제기하기도 하였 다. 최제우가 처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그의 수제자 최시형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국 각지로 퍼 져 나갔다. 그는‘시천주’사상에 근거한 평등사상의 실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가령, 그는“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人卽天, 事人如天].”고 가르치면서, 특히 어린아이들과 여성 들, 노비들도 모두‘하늘님’으로 대접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아가“사람뿐만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벌레 한 마리 모두 하늘님 아님이 없으니[天地萬物, 莫非侍天主].”, 하늘과 사람, 만물을 두루 공경하 라는 삼경 사상을 골자로 하는 만물 평등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처럼 동학사상은 조선 백성들이 절실하게 소망하던 바를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백성들에게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하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귀천이 따로 없다는 초기 동학의 가르침은, 양반 제도라는 신분제 아래 신음하던 조선 백성들에 게평등의식을일깨워주었고,머지않은장래에새세상이올것이라는후천개벽의가르침은백성들에 게새세상을향한희망을불러일으켰다.또한넉넉한사람과가난한사람이서로돕고아끼라는유무상 자의 가르침은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탐학(貪虐)한 지방 관리들의 불법 수탈 때문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수많은 백성들을 동학에 입교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사람은 한울이니라, 그러므로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하셨도다. 내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이를 배우노라.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인위로 귀천을 분별함은 곧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니, 제군은 일 체 귀천의 분별을 철폐하여 선사(先師)의 뜻을 잇기로 맹서하라.
•부모님께 효를 극진히 하오며, 남편을 극진히 공경하오며, 내 자식과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오며, 하인을 내 자식 과 같이 여기며, 가축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꺽지 말며, 부모님 분노하시거든 성품을 거슬리지 말며 웃 고,어린자식치지말고울리지마옵소서.어린아이도한울님을모셨으니아이치는것은곧한울님을치는것이오 니,천리를모르고일행아이를치면그아이가곧죽을것이니부디집안에큰소리를내지말고화순하기만힘쓰옵 소서. 이같이 한울님을 공경하고 효성하오면 한울님이 좋아하시고 복을 주시나니, 부디 한울님을 극진히 공경하옵 소서.
-최시형의가르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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