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와 사상 - 경험중시 흐름,이성중시 흐름 - 빨리 시작하는 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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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

만일 소피스트에 대하여 탐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소피스트에 속하는 인물들은 여러 도시 국가들을 떠돌면서 돈을 받고 자신들이 소유한 기술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도시 국가 안에서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 특히 정치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기원전 5세기경 민주정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기술은 민회에서 연설을 하거나 많은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주장을펴나갈필요가있는시민들에게매우가치있는것으로여겨졌다.특히수사학의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많은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을 수사학자라고 광고하였다. 수사학이란, 실제로 소피스트들이 그렇게 하였듯이, 말과 글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드는 기술이며, 수사학의 목표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다른 소피스트들은 경쟁자나 논적(論 敵)을 꺾고 승리하는 기술을 가르쳤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기술의 목표는 정의가 아니라 성공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런 통속화된 소피스트들의 모습이 그들의 전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 은 소피스트들은 철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철학적 신념들 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소피스트들의 철학적 주장들 중 일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특히 자신 들이 여러 문제에 대하여‘상대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상식적으로 받아들 일 만한 주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로타고라스의‘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진리에 관하여(on truth)”라는 프로타고라스 저술의 첫 문장은 다음 과 같다.“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존 재하는 척도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척도이다.”“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명제는 프로타고라스의 상 대주의를 전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 가? 무엇보다도 초기 프로타고라스 주석가들의 주장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실재를 판단하는 것, 즉 어떤 것이 존재하며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 는다는판단을내리는것은각개인이라는점이다.두번째로이개인이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척도, 즉 기준이나 표준이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척도는 어떤 것이 존재하는지(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즉 어떤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한 개 인이경험하는바에따라서그가믿게되는바가어떤것이존재하는지그렇지않은지를,만일존재한다 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경험과 신념은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자신의경험이나신념과는전혀무관하게어떤것이존재함과존재하지않음을결정할수있는방 법을알고있는사람은아무도없다.그리고이러한기준에의해서‘측정된’것이아닌다른어떤실재를 인식할수있는사람또한아무도없다.

고르기아스의 불가지론(不可知論)

여러 소피스트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상대주의를 발전시켰다. 상 대주의는 방종한 개인주의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요, 혹은 관습에 의해서 억제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르기아스는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시대의 소 피스트로서,위에말한두가지길가운데에서전자쪽으로치우쳤다고볼수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발한 주장을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첫째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셋째로,어떤것을알수있다하더라도그지식은전달될수가없다.”
이 야릇한 주장의 진정한 의미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마도 다 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어떠한 것도 어떤 관찰자에게 그 것이 나타나는 현상보다 앞서서 그 현상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대상으로서
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로 이러한 대상이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관찰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만큼 그것을 알 수가 없다는 것, 셋째로 설령 우연히 어떤 사람이 현상으로부터 독립해 있는 대상에 대하여 어떤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타인이 그 사람과꼭같은관찰을할수가없는만큼그러한자식을타인에게전달할수없으리라는것이다.

윤리적 상대주의

모든 도덕 규범은 문화권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견해는 윤리학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 해중하나로한사회에서적용되는행위의규칙은다른사회에있는사람들의행위에적용될수없다는 것이이견해의핵심주장이다.각사회는자체의규범을가지고있으므로도덕은전적으로각각의문화 권에서 받아들여지는 표준과 규칙을 따르는 문제이다. 간단히 말해 옳다는 것은 나의 사회가 인정하는 것이고 그르다는 것은 나의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견해는규범윤리학의모든탐구활동에심각한의문을제기하고있다.왜냐하면만약옳고그 름이 어떤 개별적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도덕률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고, 또 도덕 규범이 시대와 장소에따라다르다면,모든사람에게적용될수있는이상적도덕체계를세울수있는불변의범문화적 인원리가없는것처럼보이기때문이다.규범윤리학의목적이바로이러한보편적원리의체계를세우 고, 또 변호하는 것이므로 도덕 규범의 상대성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규범 윤리학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윤리적 상대주의의 이론을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리적 상대주의가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도덕적 가치는 절대적인가, 상대적 인가?”이러한 질문은“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 규범이나 행위의 규칙이 있는가, 또는 도 덕적 표준이나 행위 규칙은 문화권에 제한되어 있는가”를 묻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모 든 도덕적 가치는 상대적이거나 문화권에 제한되어 있다는 주장을 가지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다음 세 가 지 관념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말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상대적임을 경험적 혹은 사실적인 주장을 근거로내세운다.둘째,규범적주장을할수도있다.셋째,분석윤리학적인원리를말하는것으로이해할수 도있다.윤리적상대주의라는말은이상과같은세가지입장의전부나혹은그중의하나를지시하는것 으로 사용되고 있다.

에피쿠로스학파의‘고통으로부터의 해방’

기원전 330년경 이래로 그리스 도시 국가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이제까지 국가를 지탱해 왔던 중류층이 빈민화되었다.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역경 속에서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방 법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철학의 목적은‘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는 고통을 초래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심지어 기존의 교육이 나 공적인 일까지도 거부했고, 개개인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공동체만을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고주장했다.
사람들은 흔히 에피쿠로스를 쾌락주의라고 말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사실‘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동적 쾌락)을 추구했던 키레네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는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하였다.‘아타락시아’란 바로‘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욕망을 가진다. 하지만 어떤 욕망(가령 사욕)은 우리 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반면, 어떤 다른 욕망(가령 사치품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고통만도 못하 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욕망을 선택하고 어떤 욕망을 피해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에피쿠로스는 우리 가 최소한의 의식주에 만족해야 한다고 답한다. 왜냐하면 배고픔을 면하게 해 준다는 점은 싸구려 음식 이나 사치스러운 음식이나 마찬가지이며,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 전한건강을주기때문이다.결국삶을즐겁게만드는것은계속해서술을마시고흥청거리는일도아니 고,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어떤 욕망을 선택하고 어떤 욕망을 기피해야 하는지 잘 계산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에피쿠로스는“사려 깊음(phronesis)은 심지어 철학보다도 소중하다.”라고말하였다.



쾌락주의, 에피쿠로스학파

에 피 쿠 로 스 는 인 생 의 목 적 을 ‘ 행 복 ’이 라 고 말 한 다 . 이 것 은 소 크 라 테 스 를 비 롯 한 대 부 분 의 철 학 자 들 도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행복이며, 인간이 어느 때 행복하냐에 따라 그 주장이 달라진다. 가 령 스토아학파는 덕을 실현할 때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은쾌락이라고말한다.인간은즐거울때행복하다.가령개그프로그램을보거나즐거운놀이를할때우 리는행복을느낀다.이와반대로벌을받고있거나몸이아플때,또는기분이우울할때에는인생이불 행하다고 느껴진다. 즉 모든 행복은 즐거움과 관계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인생의 목 적인 행복에 이바지하는 쾌락(즐거움)은 우리에게 좋은 것(선)이 되고, 불행을 가져오는 불쾌는 우리에게 나쁜 것(악)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쾌락은 선이고 불쾌는 악이다.
여기에서 감각적인 개념인 쾌락과 불쾌가 어느새 도덕적 개념인 선악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고자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적 특성이자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그러 므로 결국 우리에게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은 선이 되고, 고통과 불쾌를 가져다주는 것은 악이 된다. 이렇 게보면학문도인류에게고통보다는즐거움을안겨주는것이어야하고,도덕이라는것도그자체가목 적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종교 또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가져다줄지언정, 공포감을 조성하거나 협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 술 역시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무조건 눈앞의 쾌락을 추구하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쾌락 을 가져다주느냐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키레네학파와는 달리, 그는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 음을 인정한다. 가령 성관계, 음주, 마약처럼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데서 얻어지는 강하고 순간적인 쾌락 이있는가하면,문화와예술을감상하는등정신적욕구를충족시키는데에서오는약하고지속적인쾌 락이있다.대체로육체적쾌락은강력한반면짧고,정신적쾌락은약한대신에길다.
만약쾌락이인생의최고선이자목표라고한다면우리가사는동안되도록많은쾌락을누리는것이상 책일것이다.만약우리가하루살이라고한다면길게볼것도없이그저하루동안짧고강한쾌락을누리 며 살면 된다. 하루살이에게‘내일’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보통 몇 십 년 이 상을살기때문에인생의모든기간을통해쾌락의양을조절할필요가있다.되도록쾌락의양이고통의 양보다 많도록 해야 하는데, 흔히 우리가 경험하듯 육체적 쾌락 뒤에는 더 큰 불쾌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실컷술을마시고난다음날후회한다든가,한꺼번에돈을다써버리고욕을먹는다든가하는일은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강하고 짧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차라리 약하고 지속적인 정신적 쾌락을 선 택하는편이더현명할수있다.이때문에우리에게는지속적인행복을위해크고작은고통을참아야할 때가있는가하면,먼훗날의큰행복을위해지금의작은쾌락을포기해야하는경우도생기는것이다.
...(중략)... 인간은 정신적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 쾌락의 강도는 육체적 쾌락보다 더 강하다. 인간은 정신력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제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나에게 빵과 물만 있다면, 나의 행복을 제우스 신의 그것과 견주리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가난과 질병 가운데에서도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서 찾는다. 그러나 키니코스학파(견유 학파)의 영향을 받은 스토아학파가 행복을‘덕스러운 생활’ 에 있다고 봄으로써 금욕주의의 입장에 섰던 반면, 키레네학파의 전통을 이어온 에피쿠로스학파는“행복 이란 곧 쾌락에 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쾌락주의적 입장에 섰다.
그런데도 선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서 두 학파는 일치한다. 즉 스토아학파는 아파테이아(부동심)를, 에피쿠로스는 아타락시아(평정심)를 주장하였는데, 결국 이것들은 비슷한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 다. 다만 스토아학파가 도덕의 사회성을 강조한 데 비해, 에피쿠로스학파는 매우 개인주의적이어서 보편 적법칙에대한존중을찾아볼수없다는점이다를뿐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쾌락주의

쾌락주의는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비교적 단순한 견해를 보인다. 즉 쾌락주의는 행복을 쾌락의 획득 및 고통의 회피와 동일시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그러한 삶의 철학이 부적합한 것임을여러차례강조하였으며,어떤쾌락은좋은것이지만다른어떤쾌락은나쁜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쾌락주의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 다. 헬레니즘 시대의 가장 중요한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아테네에‘에피쿠 로스의 정원’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이 학교는 플라톤의 아카데미 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온과 대등한 정도의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 후 500년 동안이나 굳건히 유지되었다.
...(중략)...알렉산드로스 이후에는 도시 국가들이 권위를 잃게 되었고, 군주의 권력이 그러한 권위를 집중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그리 스인들의 개인적인 삶의 양식에도 마찬가지로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함축한다. 알렉산드로스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인간의 삶과 성공, 행동 등에 대한 그리스인 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도시 국가라는 정치적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들의삶이전개되고또의미를지니는것은철저히도시국가라는단위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이후에 도시 국가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그리스인들은 소외감, 소속감의 상실, 삶의 무의미함 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험난한 환경에 대응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평화와 안락함을 필요로 하는 관조의 삶을 포기하고, 단지 도시 국가 안에서의 성공적인 삶에나 어울리는 덕들을 잊어버리고 더욱 절실한 문제들을 생각 하는 것이었다.‘우리의 삶은 짧고 미래는 불확실하다.’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자신을 위하여 가능한 한 최대한의 삶을 움켜잡는 것뿐이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인들 은 여기서‘최대한의 삶’이 곧‘최대한의 쾌락’이라고 생각하였다.“개인의 쾌락을 극대화하라. 가능한 한 강한 쾌락을 추구하라. 그리고 그 순간을 마음껏 즐겨라.”바로 이러한 충고들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쾌락주의의 문제점

쾌락주의를 무시하거나 제거하지 않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비판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여야 만 한다. 키레네학파의 철학이 우리 일상적인 삶의 경험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 리 큰 수고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 대부분에게는(또는 거의 항상) 내일이 찾아온다. 우리 대부분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아리스티포스가 권하는 방탕한 삶을 살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점을바로알게된다....(중략)...그런삶을살기위해서우리는항상쾌락을얻을수있는기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쾌락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신경을 써야 하며, 고통을 주는 결과를 피하기 위하여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결국 이렇게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삶은 쾌락주 의가 권하는 태평스럽고 즐거운 삶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키레네학파의 철학은“쾌락주의 의 역설”이라고 불리는, 즉 우리가 쾌락을 추구하면 할수록 쾌락을 얻을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는 역설에 빠지는것처럼보인다.쾌락이가득찬삶을사는사람은대체로쾌락을의식하지않고자신이설정한목 표와 가치들을 성실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헌신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성 공하게되며그결과쾌락을경험하게된다.

개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차이

한개인이사회및정치와관련해서어떤역할을해야하는가하는문제를놓고에피쿠로스학파와스 토아학파는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을 드러낸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사회로부터 벗어나 서로 마음이 통하 는 사람들끼리의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살아갈 것을 권하면서 정치적인 삶을 감옥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어떤 현명한 사람도 결코 고독하게 혼자 살지 않는 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상 사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행위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스토아학파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면서, 누구나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키케로가 지적했듯이,“우리가 공통적인 인간상을 지니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유사한인간으로서친밀감을느낄것을요구한다.”이와같이인류에대한동료의식은스토아학 파가세계시민주의사상을전개한이유를잘설명해준다.


영국의 경험주의

르네상스를 지나 17, 18세기에 이르러 유럽 대륙에서는 합리주의 사상이 발달함과 동시에 영국을 중심 으로 경험주(empiricism) 사상이 발달한다.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이성주의)의 진리 탐구 방식은 본질 적으로 다르다. 합리주의적인 사고에 따르는 인식은 이성의 사유에 의존한다는 것이고, 경험주의적인 사 고에 따르는 인식은 감각적인 경험과 관찰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사유에 따른 진리는 합리적 이성이 직관적으로 확실하다고 파악된 진리를 근거로 해서, 이것으로부터 필연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에 따라 연역적으로서 추리해 감으로써 얻어내는 것인 반면에, 경험적 사유에 따른 진리는 우리의 감각 기 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경험적인 사실을 근거로 해서, 이것으로부터 귀납적으로 추리해 감으로써 확실한 진리 체계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인식 이론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이성을 존중하고, 이 성의 논리적이고 연역적인 추리에 의존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진리 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경험론적인 인식 이론은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개별적인 감각을 중시하고, 경험의 실험·관찰과 귀납 추리에 의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구체적이고 주관적이며, 상대적이고 개연적인 진리 가 된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은 본유적인 것을 내용으로 하는 논리적인 사변 철학을 형성하는 반면에, 경 험론자들은 후천적인 감각적 관찰을 내용으로 하는 심리적인 감성의 철학을 형성한다.
경험론은 인간의 지각이 어떻게 현실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감각적인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경험적인 사실은 객관적인 대상들로부터 감각의 참여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지성은 감각 기관을 통해서 정신 밖에 주어지는 사실들과 사물들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다. 그래서 경험론자들은“일차적으로 감각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지성 속에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적인 주류는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나 키레네학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그리고 중세의 유명론자들과 토마스주의자들에게 서 나타난다. 그러나 경험주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체계화되는 것은 근대 영국의 경험자들에 의해서이다. 경험주의 철학은 주로 베이컨으로부터 시작하여 로크에 의해 체계적으로 확립되고, 이후에 버클리에 이 르러 극단적인 관념론으로 빠지다가 흄에 이르러 회의론에 접어든다. 관한 쓸데없는 공론(空論)의 체계를 세우며, 또 공허한 논쟁을 일삼곤 한다.
‘극장의 우상(The idol of the theater)’은 사람의 판단을 잘못되게 하고 사람을 편당적(偏黨的) 인물로만들기 일쑤인 역사적 전통에 대한 충성을 가리킨다. 아마 베이컨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왕과 귀족들이 무대 위를 거니는 것을 보았을 것이며, 그 광경을 염두에 두고‘극장의 우상’이라는 표현을 만들 어 냈을 것이다.“일반이 승인하고 있는 체계들은 모두 무대 연극에 불과하며, 사실과는 관계없이 연극적 으로 꾸며진 작가 자신들의 창작 세계에 해당하는 것들이다.”라고 베이컨은 서술하고 있다. 극장의 우상 의가장나쁜예로종교적미신과신학이인간의판단에미치는영향을들수있다.다른예로는모든철 학적 분파(分派)에서 오는 비슷한 영향을 들 수 있다.

홉스의“리바이어던”

토 머 스 홉 스 의 “ 리 바 이 어 던 ”은 인 간 본 성 에 대 한 예 리 한 통 찰 아 래 자 연 상 태 에 서 의 인 간 은 만인에대한투쟁상태로살아갈수밖에없다는데에서출발한다.이는자기보호를위해사회 계약론의 기초 위에 근대 국가를 세운다는 근대 국가론을 주장한 저서이다. “리바이어던”원서 표지에 나오는 거인(괴물)의 오른손에는 검(정치권력), 왼손에는 지팡이(교회 권력)를 들고 있고, 그의 몸은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묘사되어 있다. ‘리바이어던’은“구약성서”,‘욥기’에 나오는 괴물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인간의 집 합이면서 인간의 힘을 월등히 뛰어넘는‘괴물=인공 인간=국가’를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홉스가 보는‘인간의 자연 상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
자연은 인간을 육체적·정신적 능력에서 평등하게 창조했다. 따라서 남보다 더 강한 육체적 능력을 지 닌 사람도 이따금 있고 두뇌 회전이 남보다 빠른 경우도 더러 있지만, 이러한 능력을 모두 종합해 보면, 인간들사이의능력차이는거의없다.있다하더라도다른사람보다더많은편리와이익을주장할수있 을 만큼 두드러지지는 않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음모를 꾸미거나 같은 위험에 처해 있 는 약자들끼리 공모하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충분히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평등에서 불신이 생긴다.
이러한 능력의 평등에서 목적 달성에 대한 희망의 평등이 생긴다. 즉 누구든지 똑같은 수준의 기대와 희망을품고목적을설정하며,그목적을이루기위해노력한다.두사람이서로같은것을원하지만그것 을똑같이누릴수없다면그둘은서로적이되어상대편을무너뜨리거나굴복시키려고하게된다.파괴 와정복을피할수없게만드는경쟁의주된목적은자기보존과때로는파괴의정복에서오는쾌감그자 체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일이 일어난다. 침입자가 타인 단독의 힘 이외에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농사를 짓거나 안락한 거처를 마련해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를 쫓아내고 노 동의 열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생명이나 자유까지 빼앗을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침략자역시다른침략자에의해같은위험에놓이게된다.
•불신에서 전쟁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서로 불신하는 상황에서 누구나 닥쳐올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면 선수를 치는것외에는타당한방법이없다.곧폭력이나계략을써서되도록모든사람들을오랫동안지배하여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력화하는 일이다. 이것은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범위 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허용되어 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에 필요한 범위를 넘어선 정복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에, 안전하기만 하다면 일정한 범위 안에서 만족하려는 사람들조차도 힘을 증대시키지 않고 수비만 해서는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 따 라서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침략을 통해 권력 부풀리기에 나서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지배를 위해 힘 을 키우는 것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한 일이므로 누구에게나 허용되어야 한다.
•정치 국가들 외부에는 언제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존재한다.
이로써다음사실이분명해진다.인간은그들모두를위압하는공통권력이없이살아갈때는전쟁상 태로들어간다는것이다.이전쟁은만인의만인에대한전쟁이다.즉전쟁은단순히전투또는투쟁행위 의 존재 유무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기간에 걸쳐 전투 의지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 기간 동안은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중략)...
•그와같은전쟁의여러가지불편함
따라서만인이만인에대한적(敵)인상태,즉전쟁상태에서벌어지는모든일은자기자신의힘과노 력이외에는어떠한안전대책도존재하지않는상태에서도똑같이발생할수있다.그런상태에서는노 동에대한결과가불확실하기때문에땀을흘려일한것에대한보상이불투명하다.따라서토지의경작 이나항해,해상무역,편리한건축물,이동을위한도구및무거운물건을운반하는기계,지표에대한지 식, 시간의 계산도 없고, 예술이나 학문도 없으며, 사회도 없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끊임없는 두려움 과 폭력에 의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고, 비참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것이 다. ...(중략)...
•이러한 전쟁에서는 어떤 것도 부당하지 않다.
모든사람이모든사람에대하여전쟁을하는상황에서는그어떤것도부당한것이될수없다.옳고 그름의 관념, 정의와 불의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통 권력이 없는 곳에는 법도 존재하지 않 으며, 법이 없는 곳에는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에서 요구되는 덕은 오로지 폭력과 속임이다. 정 의·불의는 육체 또는 정신의 어떤 능력에도 속하지 않는다. ...(중략)...
•사람들을 평화로 향하게 하는 정념들
인간을 평화로 향하게 하는 정념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쾌적한 생활에 필요한 각종 생활용품에 대한 욕망, 그런 생활용품을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는 희망 등이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들이 서로 협정 을이끌어낼수있는적절한평화의조항들을시사한다.


홉스의‘사회 계약’

홉스는 오늘날에도 충분한 생명력을 발휘하는 윤리설 중의 하나를 제시하고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 고 있다. 그는‘사회 계약론’으로 알려져 있는 윤리설의 창시자인데,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도덕적(정 치적) 의무들은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고 더욱 만족스러운 삶에 도달하기 위하여 상호 간에 맺은 계약으로부터 생겨난다. 홉스에 따르면, 이성은 우리에게 우리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포기하고 중앙 집권적인권력의지배를받아들이는계약을맺을것을충고한다.이러한계약을맺은후에우리는이 계약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도덕성의 근거가 놓여 있다. 의 무는 우리가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만들어 낸 일종의 구속이다.
홉스에 있어서 도덕적 의무와 도덕 규칙들은 이런 것들이 없을 경우에 생겨나는 참혹한 결과 를 피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들은 그 자체만으로 그 리고 자연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결코 아니다. 홉스는“의무는 일종의 속박”이라고 하였으며, 그 의도덕철학의대부분은왜우리가이러한속박이라는그리달갑지않은것을자발적으로받아 들여야하는가를보이려는시도라고할수있다.그리고이질문에대한그의대답은본질적으로 우리가의무의구속을받아들임으로써두개의악중에덜악한것을택하게된다는것이다.의무의구속 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즉 계약과 도덕 법칙의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의 삶은“고독하고, 곤궁하며, 험 악하고, 무자비하고, 짧다.”도덕적인 삶은 도덕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의무들 때문에 제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우리에게생존을허락할뿐만이아니라더욱만족스러운삶을살아갈수있는최선의기회를제 공한다. 도덕성은 단지 더욱 나은 거래일 뿐이다.


로크의‘자연 상태’

정치권력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의 기원을 밝혀내기 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연적으 로는대체어떤상태에놓여있는가를고찰해보지않으면안된다.그런데그것은완전히자유로 운 상태이다. 즉 그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허가(許可)를 얻는다든가 또는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존하는 일이 없는, 자연법(自然法)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행 동을 규율하며, 또한 그 소유물과 신체를 처리할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평등한 상태이기도 하다. 그곳에서는 일체의 권력과 권한(지배권)은 상호적인 것 이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갖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즉 똑같은 종류와 똑같은 등급의 피조물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런 차별도 없이, 모두 똑같이 자연의 혜택을 누리며 또한 똑같은 능력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적어도 일체의 피조물의 주(主)이시며 지배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람을 특별히 지명하시어, 그에게 의심의 여지 가 없는 명확한 지배권과 주권(主權)을 부여하시지 않는 한 — 사람들은 누구나 남에게 종속 또는 복종되 는 일이 없이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로크의 인식론

로크는‘인간의 지식의 기원과 확실성, 그리고 정도에 관한 탐구’에 착수했다. 그는 만일 지식이 무엇 으로구성되어있으며또어떻게그것이획득되는가를알수있다면지식의한계를결정할수도있고지 적인 확실성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도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지식이란 관념들 (ideas), 즉 플라톤의 이데아나 형상이 아닌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들에 의해 생성되는 관념들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관념의 기원은 경험이며, 경험은 두 가지의 형태를 띠는데 그것은 감각(sensation)과 반성(reflection)이다. 우리의 관념들은 예외 없이 감각 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며, 우리는 감각 기관 에 의해 외부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이 관념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 우리 내부 경험에 이른다. 로크가 명확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감각의 경험을 얻을 때까지는 반성의 경험을 이룰 수 없다는 점이었 다. 왜냐하면 반성은 단순히 정신이 그 자신의 작품들을 이해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 작용 은관념들이공급되었을때시작하며이관념들은감각기관을통하여외부에서오게된다.이것은곧각 개인의 정신이 처음에는 빈 종이(a blank sheet of paper)와 같아서 경험만이 그 위에 지식을 써넣을 수 있 다는 것을 말한다. 로크는 이러한 결론들을 다듬기 이전에 계속되어 오던 생득 관념론을, 즉 어떤 식으로 든 이미 정신 속에 만들어진 표준적인 관념들의 다발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는 생각을 멈추게 해 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회 계약설

사회계약설이정부구성의원리또는정치적권위의정당화근거로서자리잡게되는것은17세기근 대 이후이다. 홉스, 로크, 루소 등이 대표적인 주창자들이며, 사회 계약설은 자연 상태, 개인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라는 용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은 독립적이고 주체성을 지닌 존재자이며, 자연이 부여 한 절대적 자유와 권리(자연권)를 소유한 존재자라는 점에는 이 세 철학자가 모두 동의하지만, 사회 계약 의존재이유와형식에서는서로차이를보인다.홉스는자기생명을보장해줄절대권력자를세우고자 연 상태(전쟁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차로 사회 계약을 이해한 반면, 로크는 정부를 세우되 권력의 집 중을막기위해권력분립을주장하고,이를가능하게하는절차로사회계약을이해한다.생명과사유재 산의 궁극적 권리는 개인에게 있기 때문에 양도가 불가능하며, 시민은 이를 위반하는 부당한 권력자에게 저항할수있는권리를갖는다.루소는국가를자유로운시민들의일반의지를구체적으로실현할수있 는 인공적인 산물로 이해하는데, 국가를 지탱하는 원리가 곧 자유로운 시민들 간의 사회 계약이다. 루소 는 인간은 완전한 이상 사회인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지만 현실은 사회·제도·국가 등 사회 계약의 산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흄,“이성은 감정의 노예다.”

흄은이성을통해우리가사물들의관계를인식할수있는반면,행동의원동력은욕구라고생 각했다.이성은우리에게목적을정해줄수없고,다만우리가이미욕구하는것을달성하는방법 을 가르쳐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이성을‘감정의 노예(the slave of the passion)’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천 이성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했으며, 일반적 의미에 비해‘이성’을 협소하게 그리고‘감 정’을 폭넓게 정의했다. 이성에 관한 이러한 흄의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크게 다르다. 우리의 선호는 고정되어 있어서 이성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흄은 믿었다. 이것은 정치학이 인간의 본성 때문에 빚어지는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답변으로서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가는 결코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기를 희망할 수 없으며, 이성이 상대적으로 무 기력하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과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모종의 보수주의와 연관된다.‘관습은 인생의 위대한 안내자’라고 흄은 단정한다. 이러한 관습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는 흄이 지적하듯이, 불이나 눈을 보기기만 해도 뜨거울 것이라든가 차가울 것이라고 기대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이 러한상황에놓일때어떤특정의믿음을가질수밖에없다.


흄의 공감의 윤리설

이타적 관심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타인들이 우리에게서 더욱더 멀어진다는 이유에서 도덕은 이타 적 관심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흄은 도덕이 그러한 관심을 지나치게 많이 요구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공감(共感)에 기초한 도덕 이론에 서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흄은‘공감의 원리(the principle of sympathy)’를 중시하면서, 그것을 ‘도덕적 특질의 주요 원천’이라고 부른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태를 파악하려는 경향을 의미 하며,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더 쉽게 발휘될 수 있다고 흄은 생각하였다. 자기 자식을 다른 사람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실제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은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하는 가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 사람과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 언제나 동일 인물일 수는 없다. 이처럼 도덕의 보편적 요청과 우리의 특수한 공감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 것이다. 흄은“도덕의 제원리에 관한 연구”에서“인간 오성론”의 견해를 한층 더 일반화한 형태로 제시한다. 그는 우리가 특별히 선호하는 사람에 대한 선의보다는 인류 전체로 확장되는 선의를 강조한다.‘이성’과‘감 성’을 구별하면서도, 그는‘인류의 행복에 대한 감정과 인류의 불행에 대한 분노’를 적절한 감정으로 정의 한 다 . 1 8 세 기 의 많 은 철 학 자 로 부 터 각 광 받 던 ‘ 도 덕 감 ( m o r a l s e n s e ) ’의 형 태 에 흄 이 호 소 되 고 있 는 것 처 럼 보일때도있으며,이것은제한된공감과자기이익에토대를둔도덕적관점에서크게벗어난것이다.그 의저작전체를살펴볼때,인간에게인류전체를목적으로하는타인에대한사랑을얼마나기대할수있 는가 하는 점이 대단히 모호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흄은 도덕이 이성에 의해 수립되지 않았 음을 주장한 점에서는 한결같고 철저하며 일관된다. 우리가 선의를 베푸는 범위가 넓든 좁든 간에 도덕 은 인간에게 내려지는 명령이나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 특성의 결과일 뿐이다. 흄에 있어서 도덕
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도덕은 인간 본성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에게서 지배받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까 결정하는 일은 물론이요, 무엇을 행해야 할까 짚어 내는 일은 오로지 이 두 주인을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옳음 (right)과 그름(wrong)의 기준이, 또 한편으로는 원인과 결과의 사슬이 두 주인의 왕좌에 고정되어 있다. 이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와 우리가 말하는 모든 말에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고에서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가 복종하는 일을 팽개쳐 버리려고 노력을 기울일지라도 끝내는 오히려 그런 복종 심을끌어내고확인하게될뿐이다.말로는그주인들의제국을내팽개쳐버리는척할수있다.그러나실 제로는끝끝내거기에붙잡혀남아있게될것이다.공리성의원리는복종관계를인식시켜주고,또한이성과법률의손길로행복의틀을짜는목적을지닌체계의기초로서이러한복종관계를가정하고있다. 공리성의 원리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감각 대신에 소리를, 이성 대신에 변덕 스러움을, 빛 대신에 어둠을 중시하는 것이다.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

벤담은 빈곤층을 대상으로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구빈원을 세워‘극빈자 관리’를 개선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거리에서 거지를 줄일 목적으로 나온 이 계획은 공리주의 논리를 생생히 보여 준다. 벤 담은 우선, 거지와 마주치면 두 가지 측면에서 행복(쾌락)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동정심이라는 고통이, 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혐오감이라는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경 우든 거지와 마주치게 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공리가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벤담은 거지를 구빈원으 로 몰아넣자고 제안했다. ......결국 구빈원으로 끌려가는 거지들이 어떤 불행을 느끼든, 그러지 않을 경 우일반대중이겪는고통의합이그보다크다는것이벤담의결론이다.......벤담은구빈원에서방을배 정할 때도 공리주의 논리를 적용해 수용된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불쾌감을 최소화하려고 했다.“남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친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옆방에는 그러한 행위에 둔감한 사 람을 배정한다.”예를 들어“미쳐 날뛰는 정신 이상자나 방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바로 옆에는 농아 를 배정한다. ......창녀나 헤픈 여자들 옆에는 나이든 여자를 배정한다.”그는 또‘충격적으로 기형인 사 람들’은 장님 옆에 두자고 제안했다. 벤담의 제안은 언뜻 가혹해 보이지만, 그의 목적은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사회의 공리를 줄이는 문제를 해결해 다수의 행복에 기여하려고 했을 뿐이다.
-마이클샌델“, 정의란무엇인가”-

행위 공리주의와 규칙 공리주의

행위 공리주의는 각각의 개별적인 행위가 그들이 산출하는 쾌락과 고통(행복과 불행)의 전체 값에 따 라평가되어야한다고생각하는도덕이론이다.따라서옳은행위는어떤사람이할수있는모든행위들 중 최대한의 유용성을 지닌 행위이다. 반면에 규칙 공리주의는 평가 대상이 되는 것은 개별적인 행위들 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행위를 요구하는 규칙 또는 관행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규칙 이나 관행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여야 하는데, 그런 규칙이나 관행을 따랐을 경우 생기는 결과 를검토함으로써이러한결정을내릴수있다는것이다.만일그관행이나규칙에일반적으로따르는것 이 관행이나 규칙이 없는 경우보다 더욱 큰 쾌락과 행복을 산출한다면 또는 다른 어떤 규칙에 일반적으 로 따르는 것보다 더욱 큰 행복을 산출한다면 그 관행이나 규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 다.규칙공리주의자에게있어어떤개별적행위가옳은경우는그행위가최대한의유용성을지닌것으 로 평가되어 이미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규칙이나 관행에 따른 경우이다.
규칙 공리주의의 지지자들은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자신들의 이론을 옹호하며 행위 공리주의를 비판한 다. 첫째, 그들은 개별적인 행위들의 결과를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여러 관행들의 유용성을 평가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행위를 하는 것의 결과를 평가하기가 각 개인이 이런 방식으로 행위를 하는 것의 결과를 평가하기보다훨씬 쉽다는 것이다. 둘째, 규칙 공리주의들은 어쩌면 행위 공리주의자들이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는 약 속을파기하거나거짓말을하는것을정당화할수도있다고본다.즉어떤상황에서는약속의파기나거 짓말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큰 유용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주장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원리의 난점
벤담은‘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원리만이 도덕의 궁극적인 원리라고 생각했다. 평등이 좋은가 나쁜가하는것도이원리로판단한다면,일부사람의희생으로전체사람이이익을얻는것이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정의에 일치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조건이 문제가 된다. 다수결의 원리와 공 리주의 원리를 함께 사용하면 다수가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언제나 정당화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열사람이에이즈에걸렸는데,그병을고칠수있는특효약이한사람분밖에없다고하자.물론한사 람의 약을 열 사람에게 사용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한 사람을 뽑아야 할 필요가 있다. 1 제비뽑기로 정한다. 2 사회에 가장 많이 공헌할 수 있는 사람, 예를 들면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에 게준다.3가장높은금액을지불할사람,예를들면미국의자동차사장에게판다.4도덕적으로가장 적당한 사람, 예를 들면 강간으로 에이즈에 걸린 소녀에게 준다. 5 모두 죽어도 상관없으니 균등하게 나 눈다. 6 최대 효율(efficiency)을 발휘시킬 수 있도록 분배한다.
어떤 방법을 따라야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1 제비뽑기와 2 균등 분할이라면 평등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먼저 제비뽑기를 해 본 결과 강간범이 당첨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강간범은 목숨을 구하고 피해자는 죽어야 한다. 이것을 공평하고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남는 것은 5의 균 등 분배이다.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살펴보자.‘최대 다수의 최대 생존’이라는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올바른 선 택은 무엇일까? 이 경우에 살아남을 가능성은 한 사람분밖에 없으므로 누군가 한 사람이 살아남는다면 ‘최대 다수의 최대 생존’이라는 조건은 충족되게 된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1 제비뽑기, 2 공적주의,3자유시장,4도덕적근거,이네가지는타당하지만5균등분할은타당하지않다.
평등 원리를 우선시할 경우 올바른 선택은 5 균등 분할이며,‘최대 다수의 최대 생존’을 우선시할 경 우올바른선택은5균등분할을제외한나머지것이된다.이렇게되면평등원리와‘최대다수의최대생존’의 원리는 일치하지 않게 된다.

공리주의의 도덕성

공리주의의 도덕성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최대 선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인 간에게 있다고 인정한다. 공리주의는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키지 않는 희생이나 증대시키려는 경향을 갖 지 않는 희생은 무용지물(無用之物)로 간주한다. 다만 인류 전체나 그 범위 안에 있는 개인의 행복 또는 행복의 수단인 어떤 것에 대한 헌신은 인정한다.
공리주의는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정당한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 다. 행위자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공리주의는 행위자에게 전혀 이해관계가 없고 자비로운 제3자처럼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황금률 가운 데서우리는공리주의윤리의완전한정신을찾아낼수있다.스스로해주기를바라는것을다른사람에 게 베풀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공리주의 도덕의 이상을 나타내는 극치이다.
- 밀 “, 공 리 주 의 ” -


밀,개인의이익과전체이익의조화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인간 행동의 옳고 그름에 관한 공리주의적 판단 기준의 관 건이 되는 행복이 행위자 자신뿐만 아니라 관련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사자 본인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 이라면, 공리주의는 그 사람에게 사심 없는 선의의 구경꾼만큼이나 엄격하게 중립적인 자세 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예수의 황금률에서 바로 그러한 공리주의 윤리의 정수를 발견 할수있다.다시말해“다른사람이해주었으면하는바를너스스로해라.”그리고“네이웃 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는 가르침이야말로 공리주의 도덕의 완벽한 이상을 담고 있다. 이런 이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공리주의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 첫째, 모든 개인의 행복 또는 이익이 전체의 이익과 가능하면 최대한 조화를 이루도록 법과사회제도를만들어야한다.둘째,교육과여론은사람의성격형성에지대한영향을끼치는만큼모든 개인이 자신의 행복과 전체의 이익 사이에, 특히 보편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행동방식과자신의행복이서로끊을수없는관계임을분명히깨닫게해주어야한다.
- 밀 “, 공 리 주 의 ” -


실용주의

실용주의는 영국의 경험론, 밀의 공리주의, 니체와 베르그송의 생철학, 사회 다원주의 등의 영향을 받 아 미국의 역사적·사회적 현실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진 미국의 독자적인 철학으로, 19세기 말에 퍼스 (Peirce, C. S., 1839~1914)에 의하여 제창되고 제임스(James, W., 1824~1910), 듀이(Dewey, J. 1859~1952) 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말은‘프래그마(pragma)’라는 그리스 어로부터 나왔다. 프래그마는 본래 실행을의미한다.따라서실천혹은실재적인것을뜻한다.이를통해볼때실용주의는행동과실천을중 요시하는 철학임을 알 수 있다.‘실용주의’라는 말을 미국에서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퍼스이다. 그는 칸 트 철학에서 힌트를 얻어 프래그머티즘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칸트는“실천 이성 비판”에서 실천 이성의 명령을 선천적이며 정언적인‘실천적(praktisch)인 것’과 경험적이며 가언적인‘실용적 (pragmatisch)인 것’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퍼스는 자신의 철학에는 실용적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 보 다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실천적’이라는 말은 경험적인 확고한 기반을 가지지 못함으로써 사 상의영역에속하는‘도덕적’이라는뜻이고‘, 실용적’이라는것은확고한인간적인목적과의관계를표현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는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과 경향이 서로 다르지만 그 근본 입장은 실생활을존중하고, 지식은 실생활에 유용한 것이어야 하며,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실용 주의자들은 종래의 형이상학적 문제, 즉 세계의 근원이 정신인가 물질인가, 자유인가 필연인가 하는 문 제는 무의미한 문제로서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쟁은 어느 쪽이 진리이든 실제적인 결과에는 아무 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용주의는 형이상학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가치,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종래의 경험주의 철학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경험주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과학적 인식만을 중요시하고 사실에 대한 인식만이 학문적이라고 보는 데 반해, 실용주의는 과학적 인식과 가치 의 인식을 중요시하며, 더 나아가 종교를 인정한다.


듀이의 도구주의

듀이는 자신의 이론을 도구주의(instrumentalism)라고 명명했으며, 그것은 문제를 해결할 때 사유가 항 상 도구적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정신은 단순히 개별 사물을 인식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기체로서 인간과 그의 환경 사이의 매개자로서 작용한다. 사물들은 인간의 욕망, 회의, 위험 등과 관계가 있기 때문 에정신은그것들의영역전반에걸쳐퍼져있다.인식은인식행위,즉정신내의활동으로구성되어있 기 때문에 인식을 자세하게 기술하려면 그 인식 행위를 야기한 문제나 상황의 환경적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이 도구주의는 경험론이나 이성론과 다르다. 후자의 두 인식론은 사유와 행위를 분리시키 는 반면, 도구주의는 반성적 사유는 실제 상황을 변환시킬 때 항상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유 는마치진리가사물에내재하는정적이고영원한성질과같은진리의탐구가아니다.사유는인간과그 의 환경 간의 조정을 이루고자 하는 행위이다. 듀이의 말에 의하면, 철학의 가치를 판단하는 최선의 방법 은다음과같이묻는것이다.“일상생활의경험과그것의상황에비추어볼때그것이가지게되는결론 에 의해 경험과 상황이 우리에게 좀 더 유효하고 분명하게 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다룰 때 더이로운결과를가질수있는가?”이로미루어볼때듀이의도구주의는일종의문제해결식인식론이 라고할수있다.


듀이의 가치론

듀이는 자연 과학에 있어서 성공적이었던 탐구 방법들을 도덕 문제와 사회 문제에 확대하고 싶어 하였 다.이확대를실행에옮기기위해서그는대부분의현대철학적저술에반대하여두가지주장을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도덕적 판단들이 경험적 사실들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판단들이 실험적으로 확증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도덕적 판단들이 사실 문제에 관한 판단이라고 하는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듀이는 먼저 가치란 것이 자연 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꾸준히 또 열심히 이 를 주장하였다. 가치는 빛깔, 무게, 크기나 모양과 마찬가지 정도로 객관적인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어떤 고전적 자연 이론은 자연으로부터 감각적 성질들을 제거하였고, 또 근대의 여러 세기의 이론 들은 이와 비슷하게 자연으로부터 미적(美的) 및 도덕적 특성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듀이는 언제나 이 와 같은 추방 선고에 동의하기를 거부하였다. 경험적으로 고찰할 때, 사물들은 매섭고 비극적이며, 선하 고 악하며, 아름답고 추하며 하는 등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성 중시 흐름

소크라테스의 대화법(=문답법, 산파술)

나는 이 분이 인간의 영혼을 만지는 영혼 조각의 대가라고 단언하 네.소크라테스,이양반이빚어대는조각품을쪼개열어보면그안에 는 영혼의 신상(神像)이 들어 있지. 페리클레스처럼 이름난 연설가의 웅변을 들으면, 저 분 참 말 잘한다 생각되지만, 소크라테스와 나누는 대화에서 받는 영혼의 떨림은 없지. 소크라테스, 이 분으로 인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더 이상 살아서는 안 되겠다,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했어.
이 분의 말을 듣노라면 내가 참으로 모자라는 존재임을 절감해. 그 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지. 솔직히 고백하네. 나 는 마치 오디세우스가 귀를 틀어막고 요정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피하려 했듯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도망 치려한적도있었다네.도망치려할수록수치심을느꼈고말이야.이분을피해도망다니다가우연히이 분과마주치지.그럴때면정말죽고싶은수치심을느낀다네.어떨때는이분이아테네에서사라져주었 으면하는마음까지들더군.소크라테스이분은독사야.이분과철학적대화를하다한방물리는날엔 죽는 거지. 자신 있게 전개해 나가던 나의 논리가 뒤죽박죽되어 버릴 때, 정신이 혼미하고 횡설수설하고 있는자신을보게될때,이때처럼비참한순간이있을까?철학적대화를할때드러나는이분의광기에 가까운정열을당신들은보았는가? -플라톤“, 향연”,알키비아데스의말-

소크라테스 이전의 윤리적 사고 : 그리스적사고의세가지기준

자신의 윤리적 사고를 펼쳐 나감에 있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 당시의 그리스에 널리 퍼져 있었던 도덕적 관념들에 대하여 크게 반발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먼저이러한도덕적관념들중에는당시의통속적문화를알려주는것 들이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호모(Homer)의 신화 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는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으로부터 시작된 관념들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도덕 적 관념들은 아테네에서 일찍부터‘민주정’이라는 통치 형태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관념들은 아낙시만드로스와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의 저술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이들 은 인간의 운명이 올림포스 산에 사는 신들의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결정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생각을 거 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사건들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발전은 이성적 질서 또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낳게 하였다. 마지막으로 기원 전 5세기의 아테네에는 이른바 소피스트라고 불린 한 무리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인간 행위에 관한 상당 히 특징적인 일련의 관념들이 있었다. 소피스트는 그리스 도시 국가 안의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보수를 받고 정치적 성공의 기술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다. 대부분의 소피스트에 있어 최고의 가치를 지니 는것은실제적유용성,성공,적합성등이었지만그들중몇몇은덕은가르쳐질수있는것이라고주장함 으로써 이성적인 윤리적 논의가 가능하다는 견해를 펴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른 소피스트 중에는 부도덕 한 자기 탐닉을 찬양하는 극단적인 주장을 전파한 인물도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인식론

소크라테스는믿을만한지식을얻을수있는가장확실한방법은지적인산파술인변증술,즉숙련된 대화의 방법을 통해서라고 믿었다. 변증술은 항상 어떤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논의함으로써 시작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과정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마침 내대화의최종결과로서당초의도했던것을명료하게진술하게된다고믿었다.그기술은간단해보였 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반어법에 대해 불쾌감과 함께 그 기술의 강한 엄격성을 느끼게 되었다.“에우티프론”에서 이 방법을 처음 사용한 예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주제에 대해 무 지를가장하고다른사람으로부터그주제에관한가장충실한지식을유도해내고있다.그는이변증술 의 방법을 일종의 지적 산파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정에 따르면, 산파술은 어떤 사람이 불완전하고 그릇된생각을갖고있을때그것을점차교정해줌으로써그자신이스스로진리를이끌어낼수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영혼의 영원한 구조에, 다시 말해 숨어 있는 모순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간의 정신이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소크라테 스는 이 주장 역시 증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되는 대로 사는 삶이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심사숙고하지 않은 생각 역시 소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화에는 결론이 없이 끝나기도 하였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듣는 이에게 독단적인 관념을 불어넣기보다는 그를 질서정연 한 사유 과정을 통해 확실한 지식으로 인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도덕 철학의 기본 구성 요소

소크라테스의 도덕 철학의 일반적 주제는 플라톤의“대화편”에 등장한다. 다음의 내용은 그의 도덕 철 학의 기본 구성 요소들이다.
1. 검토되지 않은 삶은 인간으로서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는 주장
2.한개인에게있어가장적절하며중요한활동은자신의영혼을돌보는것이라는주장
3. 소크라테스 자신이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함(이른바‘소크라테스의 무지’)
4. 소크라테스의 역설
(a) 덕은 곧 지식이다.
(b) 모든 덕은 하나이다(여러 덕들의 통일).
(c)각개인은자발적으로그릇된행위를하지는않는다.따라서그릇된행위를하는것은무지의결과이다.
(d)어떤것도덕이있는사람에게해를입힐수는없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그가 탈출할 수 있도록 노력했 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결코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와 어린자식들에게 관심을 쏠리게 하여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보자 는 의견을 거부해 온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도 그의 어린자식들을 생각 해야 한다는 크리톤의 간청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자신 이몸소가르쳤던것들을위배할수있단말인가?어떻게그가진리앞 에서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크라테스는 탈출이란 아테네와 아테네의 법률 절차를 거역 하는 것이며, 그것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법률은 그의 재판과판결에 아무 책임도 없다. 잘못된 사람들은 바로 그를 고발한 사람들, 즉 아니토스와 멜레토스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법정의 선고에 순응함으로써 법률과 그 절차에 대한 자신의 경외심을 확인했다.
독배를 마신 후 소크라테스의 임종 순간을 플라톤은“파이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소크라테 스는 자신의 몸을 한 번 더 만져 보고서 약 기운이 심장까지 오면 그때 떠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몸은 점점 식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아,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다네, 꼭 갚아 주게나.’이것이 최후였다. 이것이 우리의 친구, 우리가 그때까지 알아 온 사람들 가운데 가장 훌륭했고 지혜로웠으며 정의로웠던 한 인간의 최후였다.”


플라톤의‘동굴의 비유’

상식적 차원에서 자주 발생하는 환상을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철학적 반성이 필요하다는 플라톤의 신념은“국가”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인‘동굴의 비유’를 통해 매우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비유의 형태로 표현하 고 있는데, 그 까닭은 우리 인간이 처해 있는 도덕적·인식적· 형이상학적 입장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다 생생하고 쉽 게 접근할 수 있도록 특징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우선그는다음과같이생각해볼것을제안한다.매일의일상적인삶을살아가고있는우리는평생동 안계속동굴안에묶여있는죄수와같아서오직우리앞에놓여있는동굴의벽면만을쳐다볼수있다는 것이다.그리고죄수들뒤에있는담위로사람들과여러동물들의상이지나가게되어벽면에는그들의 그림자가비치게되며,담의뒤쪽에는빛의근원이되는불이타오르고있다.벽면의그림자외의다른어 떤 것도 보지 못하고 그림자가 비치게 되는 체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죄수들은 그림자가 진정한 사람과 동물들이라고 굳게 믿을 것이다. 죄수들은 거듭해서 떠오르는 그림자들을 확인하고 파악한 후 마치 그것 들이진정한것인양그것에대하여이야기할것이다.이런상황에서몇몇죄수들이고개를돌려타오르 는 불 과 여 러 가 지 상 ( 象 ) 들 을 직 접 보 게 된 다 면 ‘ 어 떤 일 이 날 것 인 가 ? ’라 고 플 라 톤 은 묻 는 다 ( 플 라 톤 은 이 미 제한된 세계에 길들여져 있는 죄수들이 처음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한 다.).불때문에순간적으로아무것도보지못하던죄수들은점차시력을회복하고난후,처음에는담위 로지나가는여러상들이진정한것이아니라고생각할것이다.그러나잠시후그들은그런상들이벽에 비치는그림자보다더욱큰실재성을지니고있다는점을깨닫게될것이다.또한만일죄수들이동굴밖 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면“( 만일 누군가가 그들을 강제로 동굴 밖으로 끌어내어 거칠고 가파른 길을 가게 된다면”)그들은다시한번태양의빛때문에아무것도보지못하게될것이고,처음에는그들이동굴밖 에서 마주치는 대상들이—사람과 동물들이—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이러한대상들이사실상가장진정한것이며,동굴안에서보았던여러상들이나벽면에비친그 림자는단지커다란실재성을지니고있는것의모사또는반영일뿐이라는점을깨닫게될것이다.따라 서그들은실재성의정도그리고지식이나이해의정도,즉진리성의정도가존재한다는점을알게될것 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여전히 사슬에 묶여 있는 다른 죄수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반드시 안으로 돌아 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동굴 밖의 세계를 경험한 계몽된 죄수들, 즉 진리를 깨달은 자들이 동굴 안에 남아 있던 죄수들로부터 진심으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동굴 안에 있던 죄수들은 돌아온 죄수들을 허 풍쟁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꾸며대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 다. 동굴 안에 있던 죄수들도 사슬에서 풀려나서 가파른 경사의 동굴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세계를 경험 할 경우에만 그들의 이야기를 믿게 될 것이다.
이러한 동굴의 비유는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으며, 플라톤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 다.동굴의비유는우리의계몽된견해가아직어둠속에머무르고있는다른많은개인들로부터거부당 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비난하고 사형 에 처하였듯이 우리를 비난하고 처벌하려고 할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

플라톤의 형상론(이데아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공헌이다. 근본적으로 형상이나 이데아는 불 변적이고 영원하며 비물질적인 본질로서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적·시각적 대상들은 단지 그것의 조잡 한 모사(模寫)에 불과할 뿐이다. 삼각형이라는 형상이 있고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삼각형은 단지 그 형 상의 모사에 불과하다.
비물질적인 실재로서의 형상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플라톤의 이론에 있어 매우 새로운 면을 이미 보여 주고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실재를 몇 가지 종류의 물질적 재료로 생각했던 반면에, 플라 톤은 비물질적인 형상이나 이데아를 참된 실재로 내세웠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피스트는 물질적인 질서 가 항상 유동하고 변화한다는 이유에서 지식을 상대적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플라톤은 지식을 절대적 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유의 참된 대상은 물질적 질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이데 아의질서이기때문이다.비록개별적인선을판단할수있게하는하나의절대적인선이존재한다는소 크라테스의 주장이 이러한 견해를 예견하기는 했지만, 플라톤은 그 최고선의 개념에 형이상학의 이론, 즉 실재의 모든 구조에 대한 설명과 그 속에서의 도덕적 위치에 대한 설명을 부가함으로써 소크라테스의 윤리학적 관심을 뛰어넘었다. 더욱이 플라톤은 이 형상론을 통해 일자와 다자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할 수 있었는데, 이는 만물은 일자라는 파르메니데스의 결론과 만물은 유전한다는 헤라클레이토 스의 결론을 우회한 것이었다. 그는 수학에서 유래된 피타고라스적인 형상의 개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 다. 그러나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새로운 어떤 것이었고, 그의 모든 철학에서 중심 개념이 되었다

철인에 의한 통치가 필요한 이유

국가를수립할때우리가관심을두는것은어느한집단을특히행복하게하는것이아니다.시민전 체가 최대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름에 가장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행복한 나라를 만 들기위해소수의사람들을따로분리하는것은이들만을행복하게하기위한것이아니라,이들이시민 전체를행복으로이끌도록하기위해서이다.......저마다타고난성향에따라각각한가지일에대해그 것에해당하는개인을배치해야한다는것은명확하다.이렇게함으로써나라전체는여럿이아닌‘하나 의 나라’가 된다. ......철학자들이 나라를 통치하지 않는 한, 또는 현재의 최고 권력자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철학을하게되지않는한,그리하여철학과정치권력이하나로결합하지않는한나쁜것들은끝 나지않는다. -플라톤“, 국가”-


철인왕

전사들 중에서 재능이 가장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20~30세가 될 때까지 알맞은 신체적인 단련과 더불 어학문적인교육을시킨다.이때다시가장뛰어난자를골라내어제3의신분,즉완전한수호자의신분 에 들게 한다. 여기서 플라톤의 국가의 본래적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즉 이 완전한 수호자들은 완전한 철인(哲人)이 되어, 플라톤의 국가를 진리와 이상이라고 하는 토대 위에 올려 세워야 한다. 그래서 이들 은우선다시5년간철학,수학,점성술,미술을연구하고,특별히세계의모든법칙과진리와가치들에통 달하기 위해 철학적인 변증법을 연구해야만 한다. 그 뒤에는 15년간 세상과 삶을 실제로 배우기 위해 높 은 관직에 종사한다. 그리고 이 선택받은 자(엘리트)들은 50세가 되면 물러나서 선(善) 자체를 직관하는 생활만 하면서 국가를 이끌어 나갈 위대한 생각들을 내놓는다.“철인이 왕이 되거나, 왕이 철인이 되지 않고서는 백성들의 불행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정의란 무엇인가?’하는 것이“국가”의 주제였다. 대 답은다음과같다.정의란올바름이다.즉국가,인간,법률및제도등에포함되어있는모든것들이참이 어야 하고, 이상적인 질서에 알맞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 히 해야 할 것이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공식화한 것이“자기의 책임을 다하라.”고 하는 것이 다. 진리, 지혜 및 순수한 윤리적인 의지가 이 정치학의 기초가 되며, 따라서‘가장 선한 자’가 통치하는 귀족제도의국가가 플라톤이생각하고있던국가였다.
플라톤도생각했던바와같이,국가의꼭대기에가장선한자로서올라서는사람이꼭한사람일뿐일 때는, 이것을 우리는‘군주제’라고 한다. 이 사람은 전능한 자일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가장 큰 세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지혜와 윤리적인 의지를 통해 완전히 정의를 옹호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와 개인

플라톤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의 자연적인 제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기원은 인간의 경제적 욕구의 반영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즉‘어떤 개인도 스스로를충족시킬수없기때문에,즉우리모두는많은욕구들을소유하기때문에국가가발생하게되었 다.’우리의 많은 욕구들은 많은 기술을 요구하며, 어느 누구도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 밖의 다양한 기술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노동의 분화도 필수적이다. ...(중략)...
개인과국가의관계는이제명백해진다.왜냐하면국가내의세계층은영혼의세부분의연장이기때 문이다. 기술자나 장인 계층은 영혼의 가장 낮은 부분, 즉 욕망을 나타내며, 전사는 영혼의 기개 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최상의 계층인 통치자는 이성적 요소를 나타낸다. 이러한 분석은 논리적 엄격성을 갖는것처럼보인다.왜냐하면다음과같은관련성을쉽게상상할수있기때문이다.1개인의욕망과이 욕망을충족시키는노동계층사이의관계,2인간의기개의요소와그역동적힘을거대한규모로변형 한 군대 조직 사이의 관계, 3 이성적 요소와 지배자의 영도력이라는 특수한 기능 간의 관계가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모든 기술과 탐구, 또 모든 행동은 어떤 선(善)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선이란 모든 것이 목표로삼는것이라고한주장은옳은것이라고할수있다.......그런데행동,기술,학문에는여러가지 가있기때문에목적또한여러가지로많다.가령의술의목적은건강이요,조선의목적은배요,병법의 목적은 승리요, 경제학의 목적은 부(富)이다. ...... 목적은 다양하고, 이 목적들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어 떤것때문에선택되기때문에,모든목적이다같이궁극적인목적이아님은분명하다.그러나최고의선 은 분명히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만일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우 리가구하고있는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인생의 궁극 목적‘행복’

“모든기능과모든탐구,그리고모든종류의고의적활동은어떤좋은것의달성을목표로삼고있다. 그 러 므 로 우 리 는 ‘ 좋 은 것 [ 善 ] ’이 란 모 든 것 이 목 표 로 삼 고 바 라 는 견 해 에 동 의 해 도 좋 을 것 이 다 . ”라 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첫 구절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설의 전체적 방향을 암시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그것이 고의적인 경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개별적 행위의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예컨대 잉크의 병마개를 여는 것은 펜에 잉크를 묻히기 위해서요, 잉크를 묻히는 것은 글씨를 쓰기 위해서이며, 또 글씨를 쓰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듯이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수단과 목적의 계열을 연달아 거슬 러올라가면마침내그이상더올라갈수없는단계,즉그자체를위해서그것이소망되는무엇에도달 하게 될 것이다. 이 마지막 무엇이 바로 인생의‘궁극 목적’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리한다.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하여 소망되는 것’이 곧 인생의 최고선(最高善)이 아닐 수 없다고 그는 단정한다. 아리스토 텔 레 스 에 게 있 어 서 ‘ 궁 극 목 적 ’은 행 위 의 가 치 를 재 는 기 본 척 도 인 까 닭 에 , 그 것 의 발 견 은 윤 리 학 전 체 를 위한 관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인생의 궁극 목적은 무엇일까?‘궁극 목적’이라는 개념 자체의 분석에 서아리스토텔레스는궁극목적이갖추어야할두가지성질을제시한다.그두가지성질이란1궁극성, 즉그것이다른무엇의수단이될수없다는뜻으로서의자기목적성과,2완전성,즉그이상아무것도 보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서의 자족성(自足性)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성질을 갖춘 것은 바로‘행복
(eudaimonia)’일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행복’이 아닌 것

아리스토텔레스의‘행복’이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상 다른 것을 보탤 필요 없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행복’이 최고의 선이라는 견해에 대해 일 반인은 언어상으로, 즉‘그 명칭에 관해서는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바로 행복이냐는문제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 과제는 행복 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일이다. 인생의 궁극 목적이 행복이라고만 대답하고, 그‘행복’이 무엇인 지 밝히지 못한다면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행복이냐는 물음에 스스로 대답하기를 꾀하기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다른 사람 들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음미한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생활 태도로 미루어, 일반인이 행복이라 고 믿기 쉬운 것에는 네 가지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다. 첫째,‘쾌락’이 곧 행복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속된 대중이 찬동하기 쉬운 이 견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의하지 않는다. 쾌 락이노예나짐승의목적이될수있을지는모르나이성적존재로서인간의목적이될수없다는것이다. 둘째‘, 명예’가곧행복이라는의견이다.그러나주로‘신사계급’이갖기쉬운이견해에대해서도아리스 토텔레스는 찬동하지 않는다. 명예란 그것을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이에게 달려 있는데, 그와 같이 피동 적이요 우연적인 것을 행복, 즉 인생의 목표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덕(arete)’이 곧 행복이라는 의견이다.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덕이 쾌락이나 명예보다는 행복에 가까움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덕 도 그 자체로 행복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 덕이란 한갓 능력으로서 전혀 발휘됨이 없이 잠잘 수도 있으며, 2 덕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생애를 보내는 예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재산’을 행복과 동일시하는 실업가의 견해에도 찬동할 수 없다. 재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끝으로‘선의 이데아(idea)를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고 보는 플라톤의 견해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동 의 하 지 않 는 다 . 그 이 유 로 서 는 아 리 스 토 텔 레 스 는 1 ‘ 선 ’이 라 는 말 이 경 우 에 따 라 여 러 가 지 의 미 로 쓰 이 고 있다는 사실, 2 현실적인 좋은 것들을 떠나서‘좋음’그 자체라든가 좋음의 원형(元型)이라는 것이 따 로없다는것,3설령‘선의이데아’가있다하더라도그것이이지상에있어서의실천생활에는아무소 용이없다는것을들고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하는‘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행복’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행복을 어떤 정지된 상태로 보지 않고 활동 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믿는 까닭에, 그의 행복론은 우리를 독특한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행복하다는 것 은 쉬 운 말 로 ‘ 잘 산 다 . ’는 뜻 이 요 , ‘ 잘 산 다 . ’는 것 은 ‘ 잘 한 다 . ’는 뜻 이 다 . 다 시 말 해 각 순 간 에 있 어 행 동 을 잘하면그것이합해져잘된삶을형성할것이요,유감없이잘살면그것이곧행복이아니냐는생각인것 같다.그렇다면‘잘한다.’는것은어떻게함을가리킬까?‘노래를잘한다.’‘, 요리를잘한다.’등의말로알 수 있듯이‘잘한다.’는 것은 행위자가 자기의 기능을 잘 발휘함을 가리킨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한 다.각자는그처지와직책에따라그기능이다르다.재단사는재단사로서의기능을잘발휘함이그기술 자로서잘하는것이요,운전사는차를잘모는것이운전사로서잘하는것이될것이다.그러나우리는재단사나 운전사이기 전에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잘살기 위해서는 어떤 특수한 기술을 잘 발휘하기 보다도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잘 발휘해야 할 것이며, 그 인간으로서의 기능이 잘 발휘되는 곳에 인간으 로서의 행복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으로서의 기능이란 어떠한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이성과 사유만을 사람을 사람 답게 하는 참된 기능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유를 본질로 삼는 이성의 기능을 유감없이 잘 발휘함이 인간으로서의 좋은 삶이요, 그것이 곧 인간의 행복이자 궁극 목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성의 일시적인 발휘만으로는 행복이 될 수 없다.“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해서 여름이 온 것이아니며,하루의맑은날씨가여름을부르지못하듯이”일생을통하여이성이한결같이발휘될때비 로소행복이실현되는것이다.그리고이성을항상발휘하기위해서는그렇게하는경향또는습성이필 요 하 다 . 이 습 성 이 곧 ‘ 덕 ’이 라 고 불 리 는 것 이 니 , 덕 은 그 자 체 가 행 복 이 되 는 것 이 아 니 지 만 , 행 복 을 위 하 여 불가결한 바탕이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중용’

덕에는두가지종류가있다.지성의덕과품성의덕이그것이다.지성의덕은대체로교육에의해형 성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한편 품성의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이런 까 닭에‘에티케(도덕적, 윤리적)’라는 말은‘에토스(습관)’라는 말을 조금 고쳐서 만든 것이다. 이것으로 미 루어볼때,도덕적인것은그어느것이나본성적으로우리가타고난것이아니라는것이분명하다.본성 적으로존재하는것을우리가반복적인학습을통해그본성에반대되는것으로변화시킬수는없다.예 를 들어 돌은 본래적으로 던지면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천 번, 만 번을 던져 그것을 위로향하도록훈련시키고자해도그렇게는도저히할수없다.또불을훈련시켜불꽃이아래로향하도 록습관화시킬수없다.그어떤것이나본성에어긋나게움직이도록훈련시킬수없는것이다.오히려우 리는사물의본성을받아들여야하고,또그것들은습관에의해보다더완전하게되는것이다.또본성적 으로우리에게생기는모든것에있어서우리는먼저능력을얻고그후에활동을전개한다.이것은감각 들을 살펴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자주 보거나 자주 들음으로써 시각이나 청각을 가지게 된 것 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런 감감을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것들을 활용함으로써 그것들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덕의 경우에는 우리가 먼저 그것을 실 천함으로써 비로소 덕을 얻게 된다. 여러 기술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먼저 그것 을 함으로써 비로소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집을 지어 봄으로써 건축가가 되고, 악기를 연주함 으로써 악기를 타는 악사가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옳은 행위를 함으로써 옳게 되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기 있는 행위를 함으로써 용감하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윤리학”-


스토아학파

스토아학파가 적절한 행위를 장려하는 까닭은 바로 그런 행위가 이성을 더욱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그 러나이성이삶전체를조망할수있게되면,즉단지자연적충동에따른목표들에도달하는좁은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연 전체를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어떤 수준에도달한것이라고할수있다.이런수준에서우리는예를들면,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임을—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알 게 된다. 따라서 죽음을 피하려는 자연적 충동의 수준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 가 되어 죽음까지도 평온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성이 완전하게 발전 하게 되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위를 할 능력, 즉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관점 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적절한) 것을 행하기보다는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도덕적인 삶은 이성을 필요로 하는데, 우선 전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이성이 필요하며, 그 다음에는 이러한 지식과 일치하는 행위의 원 리들을 채택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타락한 상태에서의 정념들은 비이성적 이다. 또한 이들은 동요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정신의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과도한 충동은 비이성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느낌들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정념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실들과 사실들을 지배하는 법칙에 비추어 볼 때 부적절한 느낌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스토아학 파는 자주 정념에 빠지는 것을 비난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매우 강경한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즉 정념의 희생물이 되는 것은 일종의‘질병’에 감염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자는‘영혼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정념이라는 타락이 지닌 해악(害惡)을 알리고, 또 사람들이 정념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부동심(apatheia)의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세의 윤리설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로 꼽히는 두 사람, 즉 4~5세기에 걸쳐 활동하였던 아우구스티누스와 12세기에 등장하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가 전달하려는 바와(또는 그리스 도교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과) 그리스 철학을 종합하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신학과 철학을 발전 시켜 나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로 플라톤과 그의 뒤를 잇는 플라톤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였던 플로티누스로부터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의 사상을 부활시켰으며, 여기에 자신의 사상을 더하여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합쳐 진탁월한혼합물을만들어냈다.중세의모든철학자들은어떤방식으로든고대그리스에근원을둔문 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중세의 사상가들의 철 학을 구성하는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들은 당연히 그리스도교의 교리, 즉 세계와 인간을 창조한 유일하 고영원한신이존재하며,인간을사랑한신이인간을죄에서구원하기위하여자신의아들예수그리스 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었으며, 신은 심판자로서 인간들이 지상에 잠시 머무르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판정하여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낸다는 등의(또한 여기에는 신의 은총도 당연히 포함되는데) 교리였다.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여러 개념들은 이런 교리들을 정교하게 만들고, 또 상세히 해석하 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이런 개념들은 그리스도교가 보편적으로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치도록 만들었 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그리고 다른 중세의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철학이 인류 전체에 대한 일 반적인 진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 철학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스러운 사유의 과정을 통해 신의 가장보편적인본질규정들에대한인식을넘어더나아갈수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인식 방법이필요하다. 이런 인식 방법을 그는 유추(Analogie, 비교 대상의 비슷한점을찾아비슷한결론을이끌어내는간접추리의방법. 그리스도교의 신 존재 증명에 자주 쓰임)를 통한 통찰이라 부르고, 그것을 처음으로 상당히 큰 규모로 발전시켰다.
이런 방법에서도 그는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신을 창조된 존재로 여기게 되며,그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르치는 대로, 신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이다. 신에 대한 사유로부터 다른 모든 현실 존재도 창조된 것들이라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창조된 것들은 창조자의 흔적들을 지닌다고 아우구 스티누스는생각했다.그래서모든현실에서특히인간에게서이모든것을있게만든그분을알려주는 표지들을 찾아내려고 하였으며, 그런 흔적들이 찾아지면 인간과 세계, 즉 신의 창조 작품들로부터 창조 를 한 존재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과 신학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사유하며 글을 썼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학자였다. 동시에 그는 신학적인 저서를 저술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깊이 의존했다. 그가 철학과 신학을 함 께취했다고해서두원리를혼동하고있었다는뜻은아니다.인간 의진리추구에서철학과신학은상보적인역할을한다는것이그의 입장이었다. 그가 이 두 입장을 결합시키려고 했다는 사실은 13세기 사상에서 종교적 성향이 지배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이 시기에는 신학의 중요성이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신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식에 대한약간의 오류로 인해 인간의 삶의 방향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신에게서 멀어질 수도 있고 그에게로 향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목적과 결부되어 고찰되었으며,그것들은 인간에게 신에 대한 지식을 주는 방식의 차이로 구별되었다. 철학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발견 된 원리에서 출발하는 반면, 신학은 무조건의 계시로부터 받아 신앙의 문제로 돌리는 원리들을 이성적으 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아퀴나스의 철학은 대부분이 자연 신학의 영역에 속하며, 아퀴나스도 자신의 신학을 이성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데카르트의 방법론

데카르트는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 즉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인‘이성’을 모든 사람 이 공평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진리에 이르는 길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이 다.이신념은오직이성만이우리를진리로이끌어줄수있다는독단적인입장과는구별되 어야 한다. ...(중략)... 당시의 학문적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어느 하나 확실한 지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로 갈등하는 의견들만이 만연했고, 이런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떤 방법 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의론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데카 르트는이런시대적위기의원인을인간정신의본성,특히이성그자체의결함에서찾지않 았다. 대신 그 책임을 이성의 잘못된 사용에서 찾았다. 이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 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방 법 론 이 란 이 성 의 올 바 른 사 용 을 위 해 지 켜 야 할 규 칙 을 가 리 킨 다 . 데 카 르 트 는 “ 방 법 서 설 ”에 서 자 신 의방법론적규칙을다음과같이네가지로요약한바있다.
첫째,명증하게참이라고인식한것외에는그어떤것도참된것으로받아들이지말것.즉속단과편 견을 신중히 피하고,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석·판명하게 내 정신에 나타나는 것 외에는 그어떤것에대해서도판단을내리지말것.
둘째,검토할문제들을잘해결할수있도록각각의대상을가능한한작은부분으로나눌것.
셋째, 내 생각들을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갈 것. 즉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마 치계단을올라가듯조금씩올라가가장복잡한것의인식에까지이를것.그리고본래전후순서가없는 것에서도 순서를 상정하여 나아갈 것.
넷째,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다고 확신할 정도로 완벽하게 열거하고 전반적으로 검토할 것.


데카르트의‘방법적 회의’

데카르트는 우리의 지식을 이루기 위한 절대적이고 확실한 출발점을 찾기 위해 회의의 방법 을사용했다.그는우리가약간의의심이라도가는어떠한것도결코받아들여서는안된다고하 면서, 이제‘나는 전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거부해야만 한다.’며 모든 것에 대해 회의를 품었다.
내가나의육체의존재나내가깨어있다는사실또는내가기만당하고있다는사실,다시말 해모두가환상이거나거짓이라는사실을회의한다고해도내가전혀회의를가질수없는한가 지 사실이 남게 된다. 즉‘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회의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며, 사유 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어떤 무엇일 수밖에 없다. 또한‘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 다.’라는 이 진리는 너무나 확고부동하고 확실해서 회의주의자의 어떠한 과장된 억측도 그것을 붕괴시킬수가없다고말하는동안,나는그것을내가추구했던철학의제1원리로주저없이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데카르트는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리가 매우 확실하므로‘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결론은 질서정연하게 사색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중에서 제1이고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이것을 자아와 사물들, 참된 관념들, 그리고 신에 대 한 회의를 발전시키는 근본 진리로 삼고 있다.
스피노자‘신은 곧 자연이다.’ ‘그 자신에게 존재하는’실체는 당연하게도 그 존재를 위한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 전한자립적존재이다.이실체와대조적인것이그존재를위해다른것을필요로하는유한 한 존재자이다. 유한자를 다른 것으로부터 한정되는 것이라 본다면 유한자에게 있어 다른 것 은자신을한정하고,자신과대립하는것이라볼수있다.즉유한자의상호관계란서로대립 하고한정하는관계의것이다.그렇다면그존재를위한다른것을필요로하지않는실체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스스로 대립하지 않는 절대적 존재로 간주된다. 그리스도교 신의 경우 조 물주로서의 신은 피조물로서의 세계를 초월한 존재로 보인다. 여기서 신은 세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세계와 대립하고 있다. 즉 신과 세계는 피안과 차안처럼 대립하고 있다. 이것은 신이 세계와 대립했다는 의미이므로 일종의 상대적인 것이 되고, 절대적인 것은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이 정말 절대적인 것이 되려면 그것이 세계와 대립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스피노자는“신은 모든 것의 내재적 원인으로 초월적 원인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신은 그 리스도교 신처럼 세계에 초월해서 대립하는 신이 아니라, 내재 신이 된다. 즉 스피노자의 신은 내재 신으 로서 세계와 대립하는 일종의 상대성이 있다. 그에 의하면, 신이 정말 절대적이 되려면 내재적이어야 한 다 . 그 래 서 ‘ 신 이 유 일 한 것 이 라 는 것 , 바 꿔 말 하 면 자 연 중 에 는 유 일 한 실 체 밖 에 존 재 하 지 않 는 다 . ’고 말 할때자연중모든유한자는이실체중에존재하게된다.신또는실체의유일성,절대성은자연과신과 동일성에 이르게 된다. 유신론 철학에서 혹은 그리스도교 철학에서 자연은 피조물이고 초자연과 대립하 지만, 스피노자에 있어서 초자연은 존재하지 않고 자연만이 존재하게 되며‘자연=실체=신(神)’등식이 성 립되어, 신이 바로 자연이라는 그의 철학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 생긴 것이다.
스피노자,“자유 의지는 없다. 결정되어 있을 뿐!”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 도록어떤원인에의해결정되며,이원인역시다른원인으로인하여결정되고,이것은다시금다른원인 에 의해 결정되며, 이렇게 무한히 진행된다. ......이처럼 젖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욕구한다고 믿으며, 성난 소년은 자유 의지에 따라 복수를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는다. 술주쟁 뱅이는 나중에 술이 깨면 공연히 말했다고 후회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지 껄인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미치광이, 수다쟁이, 어린아이와 이러한 종류의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그 들이 갖고 있는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지껄이면서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말한다 고믿는다. -스피노자“, 에티카”-

스피노자의 범신론

우리는 스피노자를 범신론자라고 부른다. 유신론의 신학(즉 대부분의 그리스도교도와 유대교도, 이슬 람교도들이 받아들이는)과는 달리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한편에는 신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에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므로 이들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서로 구별되는 실재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유신 론에 따르면, 신은 영원한 존재로서 무로부터 세계와 시간을 창조하였다. 따라서 세계와 시간은 신과 분 리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유신론자에 있어서 신은 순전히 정신적인 존재이다. 반면, 신이 창조한 물 리적 세계는 물리적이며 인간은 물질과 정신의 혼합체이다. 범신론자로서 스피노자는 신이 순전히 정신 적인 존재라는 점을 거부한다. 즉 신은 물리적인 부분도, 즉 세계라는 부분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곧 세계이다. 그러나 신과 세계는 순전히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신을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있는동시에영혼을지닌것으로도,또는스피노자가즐겨쓰는표현을빌리면정신적인것으로도파 악할 수 있다. 신은 연장성을 지닌 물체임과 동시에 정신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연장성과 사고는 우리가 신의 본성을 파악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연장성과 사고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면, 신의 본질적 특 성또는속성들중의두가지이다.신적인존재는연장성을지닌물체전체임과동시에정신적관념전체 로 파악될 수 있다. 신과 자연을 동일시한 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신에 도취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또한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하였다.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

스피노자는 철저히 이성적인 삶을 지향하였다. 그는 우주를 필연적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 한 기계로 생각하였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로 필연적으로 서로 맺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생각은 그의 저서인“에티카”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연역적 관계에서 발견되는 필연성은 인과적 관계에서와 동일한 필연성을 반영한다. 만일 하나의 사 건이 다른 사건을 일으킨다면 후자는 전자가 발생하였을 경우에 반드시 발생하여야 한다. 물리적 세계의 인과적 필연성은 관념의 세계에서의 논리적 필연성과 동일하다. ......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반드시그러한방식으로일어나고야만다.자연안에서일어나는모든일은물리적자연법칙에따라일 어나는데, 이 법칙은 결국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을 표현한다.
인간도자연의일부라는점을떠올려보자.어떤것도우연히일어나지않으며,일어나는모든것은필 연적으로 일어난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이러한 입장에 정신과 육체가 어떤 상호도 주고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더하면 결국 인간의 육체는 전적으로 자연과 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의육체는자연이라는물리적기계전체의한부분에지나지않으며,육체의모든활동은이기계를 지배하는 법칙 그리고 운동에 선행하는 물리적인 조건의 측면에서 남김없이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소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불충분한 지식밖에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진정으로 이성적이 되어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원인과 질서를 인식할 수 있 다면,그는마음의안정과평화를얻어이웃을사랑하고우주와참된조화를이룰수있을것이다.스피노 자는 이렇게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관조하는 데서 오는 평온한 행복이야말로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최 고의 선이라고 보았다.

칸 트 는 ‘ 거 짓 말 도 방 편 ’이 라 는 데 반 대 한 다 .

안네 프랑크가 수색하기 위해 온 나치스에게“유대인은 없 다.”라고 거짓말을 해서 유대인을 지켜 준 일은 폭력으로부터 타 인의 권리를 지켜 주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 자칸트는“사람의생명을구하기위해거짓말을하는것은옳지 않다.”라고 주장한다.‘인간애를 위한 거짓말을 할 권리에 관하 여(1797)’라는 논문에서“우리의 친구를 암살자가 추격해 와 친 구를집안으로들이지않았느냐고우리에게물었을경우,이암 살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죄가 된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정치가인 콩스탕은“권리 없 는곳에의무는없다.진실을말하는것은의무이다.하지만그렇 다하더라도그의무는단지진실에대한권리를가진인간에대 해서만이다.”라고 하여 칸트를 비판하였다. 이것은 키케로의
“상대가 불성실할 때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과 같다.
칸트는“진실은 소유물처럼 그것에 대한 권리가 갑에게는 승인되고, 을에게는 거부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인과 관계에 있어 칸트는“없다.”라고 거짓말을 하면 친구가 살 수 있고,“있다.”라고 바 른 말 을 하 면 친 구 가 살 해 당 한 다 는 식 의 관 계 는 성 립 하 지 않 는 다 고 주 장 한 다 . “ 없 다 . ”라 고 거 짓 말 을 해 도 범 인 이 친 구 를 찾 아 내 어 살 해 할 지 도 모 른 다 . “ 있 다 . ”라 고 진 실 을 말 하 여 도 친 구 는 이 미 유 유 히 달 아 나 고 없을지도모른다.그러므로거짓말을하면친구가살수있고진실을말하면살해당한다는식의인과관 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진실을 말해 친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일이‘내가 친구를 살해했 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진실을 말하는 행위와 친구가 살해되었다는 결과 간의 관계 는 우연적이다. 따라서 친구 쪽에서 내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누구에 게도 진실을 말할 권리가 있다. 거짓말을 하면 그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지만, 진실을 말하면 그우연적인결과에책임을질필요는없다.
“성실은 절대적인 의무이므로 계약으로 발생한 모든 의무의 기초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되며, 만약 그 것에 조금이라도 예외를 인정해 버린다면 의무의 법칙은 동요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진술에 있어서 성실하다는 것은 신성하며 무조건적으로 명령하는 이성 명령이다. 이 명령은 어떤 경우에 도 제약받지 않는다.”칸트의 주장을 정리하면 대체로 이런 뜻이 된다.


칸트의 정언 명령

칸트에따르면의무에대한모든언급은명법혹은명령의언어로번역될수있으며,도덕적의무들자 체는명령의힘을가진다고말할수있다.칸트는두가지종류의명령을구분하는데,가언적인것과정언 적인 것이 그것이다. 가언 명령의 정식은 다음과 같다.“만약 당신이 A를 원한다면, B를 행하라.”정언 명령의 정식은 간단하다.“B를 행하라!”즉“진실을 말하라.”와 같이 이성이 본질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밝 혀 주는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가언적 명령, 혹은 수단-목적적 명령은 도덕적 행위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종류의 명령이 아니다. 정언적 명령, 혹은 무조건적 명령이 도덕적으로 옳은 종류의 명령이다. 왜냐하면 그것은도덕적책무의절대적지위에대한적절한인식을보여주기때문이다.그러한명령들은모든이 성적 행위자가 그들의 합리성에 의해 알고 있는 직관적이고, 직접적이며, 절대적인 명령들이다. 칸트는 우리가 도덕적 의무를 오로지 그 자체로 행해야만 한다“( 의무를 위한 의무”)고 주장한다. ...(중략)... 칸트에따르면정언명령은단하나만있다.하지만그는이정언명령을세가지정식으로제시한다.
•자연 법칙의 원리(principle of the law of nature):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 는 것처럼 행위를 하라.
•목적의 원리(principle of ends): 당신 자신의 인격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 로 대우하고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만 대우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를 하라.
•자율성의 원리(principle of autonomy): 너의 의지가 그 자체로 동시에 너의 준칙을 통해서 보편적 법칙을 만드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를 하라.
이러한모든정식을함께묶는논제는보편화가능성이다.어떤개별적행위의과정이그와같은종류 의상황에처한다른사람에게도적용될수있을정도로보편화될수있는가?칸트에게있어준칙이보편 화될수있는지없는지를결정하는것은우리가따르는정언명령의특수한세가지정식에달려있다.하 지만 세 가지 정식의 가장 근본적인 노선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준칙의 밖에 서서, 우리의 준칙이 우리 모두의 삶의 원리로서 적절한 것인지를 불편부당하게 그리고 개인적인 관점을 떠나 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칸트“인간의 본성:도덕성과 타산성은 서로 다른 것인가?”
과연 인간에게 도덕성과 타산성은 서로 구분되는 것일까? 만일 인간 본성이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 구하는 이기성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타산성을 떠난 도덕성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도덕적 판단을 포함한 모든 판단이 이기성에 근거한 판단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 산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도덕성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물음은 결국 인간의 본성의 물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 본성은 오로지 자기 이익 계산의 이기성일 뿐인가, 아니면 그런 이기성 너머의 보편적 도덕성 도 함께 하는가?
인간의 본성으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이기적 욕망이다.“예기”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은“음식남녀(飮食男女)”이고, 본성적으로 싫어하는 것은“사망빈고(死亡貧苦)”라고 말한 다. 한마디로 식색지욕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 욕망이 그대로 도덕적 악인 것은 아니다. 배 고프면 먹으려하고, 추우면 따듯한 것을 찾으며, 때가 되면 짝짓기를 하려는 것은 다른 일반 생명체와 마 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속하는 자연적 본성이다. 자연적인 만큼 욕망 그 자체도 선도 악도 아니다. 그러므 로우리는본능에따라행동하는동물또는그런동물의행위를선또는악으로규정하지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이 오직 욕망에 따라서만 행동할 경우 그 행동을 비도덕적이라고 평가한다. 이것은인간에게는행동을위해고려해야할것으로서욕망이상의그무엇인가가있다는것을말해준다.그 리고 우리는 그것을 흔히 자연적 욕망을 대하는 양심으로 간주한다. 인간에게는 식색지욕의 욕망 이외에 양심이란것이있기때문에단지욕망충족만을위해,자신의쾌락의증진만을향해행동하는것이아니 라, 양심의 소리도 함께 고려하여 행동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양심은도덕성을암시하는기호일뿐그자체가도덕성은아니다.양심또는양심의소리가있 다고해서그것이곧그를도덕적선으로만드는것은아닌것이다.양심의소리가있다고해도실제행위 를 함에 있어서는 그 양심을 무시하거나 양심에 반해 욕망을 따르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행위를도덕적선으로만드는것은욕망자체도아니고양심자체도아니며,바로그사이에서고 려하고 결단하고 선택하는 제3자인 것이다.
이 제3자가 바로 행위를 결정하는 도덕적 판단 주체라는 의미에서‘실천 이성’이며, 결단과 행위 주체 라는 의미에서‘의지’이다. 의지는 이기적 욕망과 이기적이지 않은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려하다가 결단을 하고 행위를 수행한다.


실존주의

실존철학은인간의존재성격을실존이라고규정하고,이실존을자기사상의중심에놓는현대특유 의 사상이다. 그것은 불안과 허무에 허덕이는 현대인을 위한 사상인 동시에, 유럽을 면면히 이어온 합리 론적 이성주의 전통에 대한 반역의 사상이기도 하다. 실존 철학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에 하이데 거와 야스퍼스를 중심으로 독일 철학계에 풍미하였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쇠 퇴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9월 사르트르가“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을 한 이 후부터 실존 철학이 아니라,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실존을 강조하는 철학이 20세기에 와서 대두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대가 처해 있는 불안한상황때문이다.오늘날인간은거대한기계와기술조직속에서마치개성이없는한낱대체가능 한부품과같이평균화되어비인간화또는자기상실의소외현상속에서살아가고있다.인간은조직속 의일원으로서는그기능의한단위에불과하고,집단속의한사람으로서는어느누구라도괜찮은어떤 자에 불과하다. 또 우리는 누구나 같은 시간에 같은 방송을 들으며 같은 신문을 읽는다. 이리하여 인간의 평균화, 기계화는 심화되어 가고, 인간성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현대의 조직화된 사회 속에서 상실되어 가는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대중 속에 매몰되어 있는 자기 존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각성을 요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출현하게된것이실존철학이다.그러나실존철학이세계적으로유행하게된가장큰이유는현대가불 안의시대라는데있다.근세의계몽주의와그뒤를이은독일관념철학은인간의이성에대한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이성을 이용한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인류 사회는 진보하고 향상되어 갈 것이라는 기대는 20세기 두 차례 발생한 세계 대전으로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의 참사를 겪음으로써 현대인은 과학과 기술에 의해 인류는 진보할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는 붕괴되었고, 인류의 존속마저도 기 대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주체적 존재로서 인 간 존재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실존 철학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실존 철학은 키르케고르, 니체 를 선구자로,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등을 대표자로 들 수 있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

키르케고르는 덴마크 사람으로 코펜하겐에서 태어났으며, 사람들에게 괴짜라고 불 리는 인생을 살았다. 그에게는 당시 독일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던 헤겔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저서가 많이 있는데, 특히“철학적 단편”과“죽음에 이르는 병”등을 통해 전 해지고 있는 사상은 헤겔 등의 독일 관념론을 기본적으로 부정했다.
덴마크 어로 발표된 그의 저서들은 19세기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20 세기 초반 독일어로 번역되면서 니체와 견줄 만한 사상가로 평가되어 하이데거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인생은 단 한 번, 우연히 태어나서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각각의 인 간이며, 어디에도 여분은 없다. 확실한 실존이야 말로 진리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인 생은 이성에 의하지 않고, 파토스(정열)에 의해 불안이나 절망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 장했다.
그가 주장한 실존의 3 단계 중 실존의 제1단계‘미적 실존’은‘향락’이다. 돈 주앙은 따분하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쾌락을 추구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쾌락의 노예일 뿐이다. 거기서 아이 러 니 ( 미 꼼 ) 를 발 견 하 고 , 제 2 단 계 ‘ 윤 리 적 실 존 ’이 나 타 난 다 . 그 것 은 양 심 을 갖 고 성 실 하 게 살 아 가 는 것 이 다.그러나또문득정신을차려보니성공한사람은오만하고,실패한사람은회한에사로잡혀있다.이 것을 유머(자신을 떼어놓음)를 통해 초월한 것이 제3단계‘종교적 실존’이다.
“구약 성서”의 창세기에 있듯이, 아브라함은 자식인 이삭을 번제(燔祭, 소나 양 등을 신에게 받치는 의 식)의제물로바치라는신의명령을받고,고민끝에끝까지순종함으로써신앙속에서삶을살게되는것 이다.
그의 사상에는 인간의 정신에 점점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게다가 엄숙하다.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쇼펜하우어의 염세 철학은 그와 비교하면 가벼운 느낌마저 든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은 하이데거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하이데거의 저서“존재와 시간”은 평이한 일상 어를 사용해서 한 번 보면 실존에 다가가 있겠지만, 본보기가 된 키르케고르를 생각하면서 읽으면 이해 하기가좀더쉬울것이다.


군중속의개인

키르케고르는군중속에묻혀있는개인의비참한상태를19세기초러시아에있던농노취주악대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 악대에서는 20인의 악사가 각각 도, 레, 미 등 자기에게 고유한 소리 하나만을 내도록되어있다.그래서자기의음을낼순서가되었을때,일정한길이의그소리를내기만하면된다. 그 리 고 이 악 사 들 은 자 기 이 름 이 아 니 라 각 자 에 게 배 당 된 음 으 로 불 린 다 . 예 를 들 어 ‘ 어 느 지 주 의 도 ’, 혹 은‘어느 지주의 미’라고 불리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기에게 배당된 그 하나의 음과 동일하게 취급된 다. 키르케고르의 비유를 적용하면, 산업 사회에서 같은 부서에서 같은 조작을 몇 백 번 되풀이하고 있는 노동자는 한 음만 내는 농노와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실존주의의 선구자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철학사에서 현대 실존주의의 시조로 꼽힌다. 그는 헤겔 철학에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었 다. 헤겔은 거대한 철학적 체계를 구축해 자연과 역사, 국가에 대한 총체적 진리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에는 중요한 요소 하나가 빠져 있었다. 바로 인간의 실존이 다. 실존의 절박성을 몸으로 체험한 키르케고르에게 헤겔 철학은 난센스이며 코미디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헤겔이강조한절대이성의명성이빛을바래지않은시대에그가새롭게해명하고자한‘실 존’개념은 무엇인가? 키르케고르는“이제 나는 눈초리를 조용히 나 자신에게로 향하게 하고, 내면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싶다. 그렇게 해야만 한층 깊은 뜻에서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다.
우울과 절망 속에서 세속적인 삶에 날카로운 비판의 화살을 돌린 키르케고르는 세속적인 그리스도교 가교회라는권력을만들어사람들위에군림하는것을목격했다.그는거대한교회권력과맞서서그리 스도교적 혁명을 감행할 것을 선언했다. 키르케고르 철학에서 신과의 만남은 개인이 주체적으로 되는 것, 즉 단독자가 되는 사건이다. 그에게 신은 객관적으로 입증되거나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신앙은 이 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하나의 역설이다. 신은 이성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능가하는 비약 이다. 이러한 비약을 감행하기 위해 그는 국외자로 남기를 자처했다. 본래적 자아로 돌아가기 위해 끊임 없는 비약과 감행의 모험을 시도하는 우울한 사람으로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사르트르의 제1 원칙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이것이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다. 사람들 은 이것을 주체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인간을 돌이나 탁자보다 더 존엄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은 미래 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것, 미래 속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을 의식하는 존재이다.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 든사람으로하여금그자신의실존에대해주인이되게하고자신의실존에대해전적으로책임을지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는 것이아니라,다른모든사람에대해책임을진다는뜻이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에의하면,인간의본성은제조과정의한상품을묘사하는것과같은방식으로설명될수없 다.예를들어절지용칼을생각해보자.누군가가그것을만들었을때그의마음속에는그것에대한개념 이 선재한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관해 사유할 때에도 인간을 하나의 제조자나 창조자나 신의 산물이 라 고 규 정 하 는 경 향 이 있 다 . 사 르 트 르 에 의 하 면 , 우 리 는 대 부 분 의 경 우 신 을 ‘ 천 상 의 장 인 ’이 라 고 생 각 하 면서신이창조할때신은자신이창조하고있는것을정확하게인식한다는가정을항상염두에두고있다.이러한입장에서볼때개인은신의오성에내포되는한정적인개념의실현이라고말할수있다. 사르트르는 진지하게 무신론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주장들을 역전시키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만일 신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개념을 먼저 지니고 있는 존재도 없을 것이므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주어진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단지 실존하고, 그 후에야 본질적인 자아로 된다. 사르트 르에 의하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는 인간이란 우선 존재하며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세계 내에 출현하며, 그 뒤에야 자신을 정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최초에는 단지 한 개인만이 존재한다.
그리고난뒤스스로만든우리가존재할뿐이다.


하이데거의‘현존재’

하이데거는 인간이 돌이나 나무처럼 그냥 단순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계획하는(그쪽을 향 해 자신을 던지는) 방향의 가능성들 안에서, 그리고 그 가능성들로부터 산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 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그래 왔던 것처럼, 인간을 인위적인 고립 속에 그대로 남겨두지 않 았 다 . 오 히 려 그 는 모 든 인 간 이 자 신 의 ‘ 세 계 ’를 가 지 며 , 그 가 다 른 존 재 들 사 이 에 서 다 른 인 간 들 과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세계-안에-있음’과‘다른 것들과 함께 있음’을 말한다.
실존이란 인간의 벌거벗은‘여기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돌이나 나무처럼 그냥 있는 것 이 아 니 다 . 실 존 이 란 인 간 이 정 말 로 존 재 방 식 으 로 있 다 는 뜻 이 다 . 곧 ‘ 자 기 를 넘 어 밖 에 서 기 ’, 자 기를 넘어서 언제나 이미 이해되었던 있음 속으로 넘어가기의 방식으로 있다는 뜻이다.‘세계-속에-
있음’을 실존으로 보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해석하면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일상적인 상황을 출발점으 로삼는다.인간은맨먼저,그리고대부분자기자신으로있지않고세계에추락해있다.그는그자신이 아 니 라 ‘ 사 람 들 , 그 들 ( m a n ) ’일 뿐 이 다 . 그 는 사 람 들 에 게 로 넘 겨 져 있 다 . 그 의 과 제 는 이 렇 게 얽 힘 에 서 벗 어나 정말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윤리적 의의

실존주의는 인간의 개성을 긍정적으로 본다. 실존주의는 이성과 같이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지닌 보편 적 특성을 통해서는 인간의 삶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른 구체성, 즉 개성 을 강조한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사물은 그 목적이 나용도등이미리결정되어있지만,인간은그렇지않기때문에자신을주체적으로만들어가야한다.그 래서실존주의는내가가진지금이모습,나의현재가가장중요하며현재의내가미래의나를결정한다 고 주장한다.
또한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시한다. 실존주의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존재의 본질이나 목적 을 말하기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나의 선택과 결단을 강조한다. 이는 각자가 결코 대상화될 수 없는 유일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것과 연결된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오늘날 개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 가고있는현대인에게삶의진정한의미를반성해보도록하고,나아가현대사회에서자칫경시되기쉬 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함으로써 삶의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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